⑮대(代)를 잇는 대나무 공예의 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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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2-01-1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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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죽물(竹物300년의 역사

담양의 죽물시장은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향교리 관방천과 만성교 사이 천변부지에서 열리던 오일장이다. 죽물시장의 통칭(通稱)은 ‘삿갓점 머리’. 이곳을 중심으로 삿갓이 유통돼서 생긴 이름이다. 
장날인 2일 7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담양의 수백 개 마을 사람들이 소쿠리 바구니 키 등을 달구지에 싣거나 머리에 이고 삿갓점 머리로 나왔다. 8㎞ 이상 떨어진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동트기 전에 새벽길을 나서 아침 6시경 읍내에 도착했다. 
담양 죽물시장은 전국에서 죽제품을 사러 오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국숫집에서도 바구니를 많이 들고 온 사람에게는 외상을 달아 주었다. 슈퍼마켓과 온라인 판매 등이 대세를 이루면서 지금은 전국의 오일장이 거의 형해만 남았다. 담양 죽물시장의 흔적은 천변 부지에서 관방제 위로 올라온 국수거리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1970년대 담양천변 죽물시장을 가득 메운 죽제품들 [사진=동아일보 제공]

'추성지(秋成誌)'는 400년 전 전주에서 담양 향교리로 이사 온 김씨 성의 노부부가 농한기를 이용해 빗을 만든 것이 담양 죽제품의 기원이라고 기술한다. 담양의 마을마다 대를 잘라 쪼개는 집, 엮는 집, 낙죽하는 집들로 분업을 했다. 
담양읍 천변리에 위치한 전국 유일의 대나무 박물관은 1만5000평 부지에 동서고금의 죽제품 3000여점을 전시한다. 담양 지역의 죽제품 역사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담양군은 우수 대나무 공예품을 발굴하고 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는 전국대나무디자인공예대전을 매년 실시해 수상작을 박물관 갤러리에 전시한다. 

 귀족적 분위기의 화려한 채상(彩箱) 

채상은 대나무 공예품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귀족적인 분위기가 난다. 조선시대에는 혼수를 담아 보내거나 귀중품을 담는 함으로 많이 쓰였다. 채상은 죽공예의 꽃이다. 
채상은 채죽상자(彩竹箱子)를 줄인 말이다. 전라관찰사를 지낸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36년간 저술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채상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
‘호남 사람들은 대나무를 종이쪽처럼 얇게 깎고 푸른 색이나 붉은 색 등 여러 색으로 물들여 옷상자를 짜서 만드는데, 안에는 푸른 색 종이를 바른다. 크고 작은 것을 겹치면서 쟁여 넣으면 채상 5개가 한 벌이 되므로 민간에서는 이를 오합피죽상(五合皮竹箱)이라 부른다. 모든 직물이나 바느질 도구를 여기에 담을 수 있다.' 
옛날에는 채상이 온 가족이 참여하는 가내수공업으로 이뤄졌다. 남자들은 대나무(왕대)를 물에 담가 불린 후 다듬고 쪼개고 훑어 얇게 대오리를 만들었다. 염색과 짜기는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부녀 2대(代)의 국가무형문화재 채상장 기능 보유자 서신정씨 [사진=황호택]

한국에서 유일한 국가무형문화재 채상장 기능 보유자는 죽녹원 채상장 전수관에서 가업을 잇는 서신정(徐信貞·63)씨. 서씨의 부친 한규옹은 1930년 담양읍 만성리 2구 벌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벌메 마을의 100가구 중 80가구가 삿갓 등을 만들어 죽물시장에 내다 팔았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삿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물건이 모자라 못 팔 정도였다. 벌메 삿갓’은 안쪽에 대는 테가 있었는데 최고의 브랜드였다. 1970년대에 들어 죽제품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한규 옹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 그때 마침 할머니가 혼수로 가져온 2합짜리 채상이 눈에 띄었다. 이 채상을 바라보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대오리에 색칠을 하고 엮고 풀고 다시 엮으면서 5년 동안 채상기법을 개발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채상장 기능 보유자 김동년씨가 1987년 작고한 뒤 한규 옹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아 채상장의 맥을 이었다. 
서씨가 열아홉 살 때 대청마루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취직할 때까지만 거들고 싶다”고 말을 꺼내자 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찼다. 아버지를 도우려다가 채상에 빠져들었다. 새벽 2시까지 불을 밝히고 기예를 닦았다. 
아버지가 만드는 패턴은 두 개였지만 문헌에는 12개가 나와 있었다. 그는 연구를 거듭해 패턴을 50개나 개발했다. 대오리를 염색하는 화학염료를 천연염료로 바꾸고 전통색인 오방색(청색 흰색 적색 흑색 황색)을 사용했다. 제품을 현대화해 핸드백, 브로치, 도시락, 차도구 바구니, 소반, 반닫이로 다양화했다. 서옹은 2012년 딸이 국가무형문화재 채상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받는 것을 보고 2018년 88세로 눈을 감았다. 
 

서신정씨가 대나무로 만든 채상 핸드백 [사진=황호택]

인쇄업을 하던 남편 김영관도 채상을 배워 22년 경력으로 채상장 전승 교육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 김승우는 “외동인 내가 이 일을 잇지 않으면 자랑스러운 가업(家業)이 끊기지 않겠는가.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일을 배워야겠다”며 채상을 시작했다. 서한규-서신정-김승우로 3대째 채상장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신정씨는 채상의 예술성 작품성이 높아 여유계층의 수요가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가방, 차도구 바구니, 접시 등 서신정이 상용화에 성공한 제품이 50종을 넘는다. 차 도구를 넣고 뚜껑을 덮어 차 도구로 쓰는 채상소반은 300만원에 가까운 가격인데도 인기를 끈다. 
작년에는 대구 신세계백화점 에르메스 매장의 스크린 도어 열두 짝의 인테리어를 협업했다. 참빗이나 부채 참빗 같은 공예는 정부의 보조를 받지 않으면 기능 전수가 어렵지만 채상은 고급화에서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 

필수 혼수였던 참빗 만들기 70년

참빗장 국가무형문화재 참빗장 기능 보유자 고행주(高行柱·86)씨는 증조부 고찬여(高贊汝)씨 이래 4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담양 향교 바로 밑에 집을 겸한 작업장과 전시실이 있다. 
옛날에는 어머니들이 동백기름 바르고 쓰다듬고 멋을 낼 때 참빗을 썼다. 참빗이 생활필수품이었다. 시집갈 때 형편 좋은 집안은 참빗 한 묶음(50개)을 함에 혼수로 넣어주었다. 고행주씨는 열 살 때 일을 배워 70년 동안 참빗을 만들었다. 
 

증조부 때부터 4대째 가업을 계승한 무형문화재 고행주씨. 참빗 만드는 수십 가지 연장이 벽을 메우고 있다. [사진=황호택]

담양에서는 조선 말기부터 300가구가 참빗을 제작했다. 한 집에 서너명씩 일을 했다고 치면 가내 수공업인 참빗 제조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담양 전체에 1000명 정도였던 셈이다. 담양 죽물시장에서 5일장이 열리는 날마다 전국 각지로 1만개 이상 참빗이 팔려나갔다. 
참빗은 빗살이 촘촘하고 길어야 긴 머리카락을 잘 파고든다. 옛사람들은 머리단장 외에 머리의 때를 빼거나 이, 서캐(이의 알)를 죽이는 데도 사용했다. 샴푸로 매일 머리를 감는 지금은 구경할 수조차 없는 곤충이다. 
참빗을 만들자면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빗살을 실로 매고, 염색, 접착과 건조, 다듬기 등 40여 가지의 공정을 거친다. 각종 연장이 작업실의 벽면을 메우고 있다. 참빗은 재질이 강한 왕대로 만든다. 입동(立冬) 후 12월 1월에 베어낸 대를 사용한다. 그래야 우기(雨期)에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아들(광록·62)은 전통 빗도 하지만 디자인을 현대화해서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참빗을 만들고 있다. 
1970년대부터 플라스틱 빗에 밀리고 동백기름을 바르던 어머니들이 파마를 시작하면서 참빗은 사라져갔다. 이제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관광상품으로 살아남아 전라남도 담양과 영암에서만 생산된다. 고씨가 생산하는 참빗에는 ‘竹香(죽향)’이라는 한문이 새겨져 있다. 고씨가 만드는 참빗의 브랜드다. 

무용선으로 중국제품 이겨낸 접선장

합죽선과 접선(쥘선)은 접었다 폈다 하는 접이식 부채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속살이 다르다. 합죽선은 대나무 껍질 두 개를 맞붙여 속살을 만든다. 접선은 대나무 껍질 하나로 속살을 만든다. 합죽선의 본향은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이고 접선은 담양이 본향이다. 
전주에서 합죽선을 만드는 김동식씨(79)가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 기능 보유자여서 담양에서 접선을 만드는 김대석씨(74)는 전남무형문화재 선자장(扇子匠)과 접선장(摺扇匠)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김씨의 조상은 200년 전 담양에 정착했고 접선은 조부 때부터 3대째 가업이다. 
 

접선장 김대석 씨 부부가 부채를 만드는 대를 함께 다듬고 있다. [사진=황호택]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만성리 마을 100가구가 1년에 50만개의 부채를 생산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지의 상인들이 현찰 뭉치를 싸들고 담양에 부채를 사러 왔다. 선거철에는 더 많이 나갔다. 그런데 중국과 수교관계가 이뤄지면서 만성리 마을에 황혼이 닥쳤다. 한국의 업자들이 중국에서 10분의 1 가격으로 접선을 만들어왔다. 만성리 마을이 모두 접선을 접었는데 그가 혼자서 버틴 것은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산과 가격경쟁을 할 수 없는 실용 부채를 포기하고 고급 특수 부채로 방향을 돌렸다. 중국산이 따라올 수 없는 분야였다. 무용선, 무당의 굿 부채, 남사당 부채, 한량무의 한량부채는 그가 100%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한 양산 같은 대륜선(大輪扇)도 있다. 왕실이나 고관대작들이 쓰던 부채다. 실용 부채는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선물용으로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다. 
 

김대석씨의 만성리 집은 작은 박물관 같다. 진열장에 들어 있는 작품은 장식용 대(大)접선. [사진=황호택]

그의 집은 부채 박물관 같다. 장식용 대(大)접선을 비롯해 유명화가들의 그림으로 제작한 부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유명화가들이 그림 두 점을 갖고 오면 한 점으로는 부채를 만들어주고 한 점은 제작비 조로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각양각종의 부채 외에 가구나 문방구 등 소목(小木) 작품도 명품이 다수다. 

인두로 그리는 예술 낙죽(烙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 순조 때 전북 남원 박창규의 낙죽 기예가 탁월해 서울의 재상들이 다투어 그의 작품을 가져갔다. 박창규의 기법은 손자에게 전해졌다’라고 쓰고 있다. 낙죽이 들어간 대나무 제품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낙죽 기법이 살아남아 있는 것도 신기하다. 
담양의 이형진씨(전라남도 무형문화재 낙죽장 기능 보유자)는 집안이 가난해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다. 1대 국가무형문화재 낙죽장 기능 보유자 이동연씨(1905~1986)가 소문을 듣고 장애 소년에게 낙죽을 가르쳤다. 
낙죽은 불에 달군 인두로 죽제품에 문양을 그려넣는 공예다. 이씨가 좋아하는 문양은 매화꽃이다. 
 

낙죽의 맥을 잇고 있는 장인 이형진씨 [사진=황호택]

요즘은 숯불 인두 대신에 전기인두를 사용한다. 가볍고 편리하지만 숯불에 달군 인두가 서서히 식어가면서 내는 깊은 맛을 살리지 못한다. 대나무에 인두가 지나가면 표면이 벗겨지기 쉽다. 인두로 지진 표면이 날아가지 않고 대에 붙어 있게 해야 장인의 반열에 든다. 
이씨는 낙죽을 배울 때 가부좌를 틀고 장시간 작업을 했다. 수업을 받기 시작한 후 1년 만에 하반신 마비가 와서 2년 동안 걷지 못한 적이 있다. 그는 요즘 대나무박물관에 있는 체험관에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이밖에도 죽렴(대발), 전라도에서 ‘치’라고 부르는 키, 대자리, 죽피 방석, 방립, 석작, 죽검을 만드는 장인들이 있다. 문화재청과 전라남도 담양군은 무형문화재, 전수조교 등의 자격을 주어 대를 이용한 전통공예의 맥이 끊이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서유구 《임원경제지 섬용지 2》 풍석문화재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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