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⓾한국 전통정원의 백미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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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입력 2021-12-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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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조광조 사화에 은거한 양산보의 별장

‘소쇄원(潚灑園)은 한국 민간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은둔과 사유,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탁월하게 드러난 유산이다.’ 오랫동안 소쇄원을 연구한 천득염 전남대 교수는 소쇄원의 특징과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소쇄원. 한국 전통 정원의 백미 소쇄원을 처음 조성한 사람은 16세기 대표적인 은일처사(隱逸處士) 양산보(梁山甫, 1503~1557)다. 담양 출신의 양산보는 15세가 되던 1517년 한양으로 올라가 대사헌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문하에 들어갔다. 양산보는 열심히 공부하고 조광조의 개혁 정신을 배우며 출사(出仕)를 꿈꾸었다.
그러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사림을 이끌던 조광조는 기득권 훈구파의 모함으로 권력을 잃었다. 조광조 그룹의 급진적인 개혁에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가 ‘주초위왕(走肖爲王)’의 계략을 짜낸 것이다. 조(趙) 씨를 파자(破字)한 走肖가 왕이 된다는 모함에 걸려들어 조광조는 전남 화순으로 유배되었다.

주인의 사색공간인 제월당[사진=이광표]


양산보는 좌절과 회의에 빠졌다. 그는 서울 생활을 접고 담양으로 내려왔다. 스승 조광조는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조광조의 나이 서른여덟, 양산보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스승의 죽음과 개혁의 좌절은 청년 양산보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양산보는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꼈고 처사의 길을 선택했다. 담양 창평의 무등산 자락 창암촌 초야에 묻히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곳이 지금의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그렇게 탄생한 소쇄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꼽힌다. 별서는 살림집에서 좀 떨어진 풍광 좋은 곳에 마련한 별장 같은 주거공간을 말한다. 여기서 소쇄는 ‘기운이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 양산보는 자신의 호를 아예 소쇄옹(瀟灑翁)으로 정했다.
소쇄원의 조성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황으로 보아 양산보가 1520년대 중반 무렵 짓기 시작했고 지금과 같은 모습은 1530년대 후반쯤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자 양산보의 손자가 1614년 다시 지었다. 이후 후손들이 잘 관리해 소쇄원은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을 둘러싼 담장. 막힌 듯하지만 다가가면 열려 있다. 멀리서 보면 기하학적 공간을 연출한다. [사진=이광표]

소쇄원엔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송순(宋純·1493~1582) 임억령(林億齡·1496~1568) 김윤제(金允悌·1501~1572) 김인후(金麟厚·1510~1560) 고경명(高敬命·1533~1592) 정철(鄭澈·1536~1593) 등등. 이곳은 면앙정(俛仰亭)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과 함께 담양을 중심으로 한 호남 가단(歌壇)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소쇄원에 모여 시를 짓고 세상을 논했다. 수많은 시인 묵객과 학자들의 정신적 위안처가 되었고 풍류와 낭만의 상징 공간이 되었다.
소쇄원을 노래한 글 가운데엔 김인후가 1548년에 지은 ‘소쇄원 48영(詠)’이 대표적이다. 김인후는 양산보와 친구이자 사돈 관계였다. 소쇄원을 지을 당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런 김인후였기에 소쇄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소쇄원의 멋진 풍광을 48가지로 정리해 빼어난 시로 남긴 것이다.

소쇄원 진입로의 대숲길.[사진=이광표]

소쇄원으로 향하는 초입은 좌우가 대나무 숲이다. 몇 분 걸어가 대숲이 끝날 즈음, 탁 트인 공간에 흙담 한 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한두 개도 슬쩍 모습을 보인다. 담장 안쪽으로 쭉 따라가면 대봉대(待鳳臺)가 나온다. 소쇄원 답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소쇄원 답사의 동선은 흔히 대봉대~오곡문(五曲門)~암반 계류(溪流)~화계(花階)~제월당(霽月堂)~광풍각(光風閣)으로 이어진다.
소쇄원에 여러 건물과 공간이 있지만, 크게 대봉대 영역(前園·전원) 제월당 영역(內園·내원), 광풍각과 계류(溪流) 영역(溪園·계원)으로 나눌 수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 이름의 유래는 11세기 중국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 1045~1105)과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얘기에서 유래했다.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논하며 ‘胸懷灑落如光風霽月(흉회쇄락여광풍제월)’이라 했는데, 여기서 따온 것이다. ‘가슴에 품은 뜻이 맑아서 청량한 바람과 같고 비갠 뒤의 맑은 달과 같다’는 뜻이다.
대봉대는 소쇄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이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초정(草亭)을 올렸다. 대봉대에 앉으면 소쇄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뜻. 기다리는 손님을 봉황처럼 모시는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봉황은 아름답다. 봉황은 아침 이슬과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 가지에 깃든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대봉대 바로 옆에는 오동나무가 우뚝 서 있다.

대봉대 내부의 편액[사진=이광표]


대봉대의 봉황을 두고 누군가는 성군(聖君)의 상징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양산보가 그리워했던 성군일 것이다. 현실을 등져야 했던 양산보의 마음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아울러 소쇄원 대봉대에 앉으면 그리운 이름이 떠오를 것만 같다. 지금의 대봉대는 1985년 복원한 것이다.
대봉대에서 담장을 따라가면 애양단(愛陽壇), 오곡문이 나온다. 애양단은 대봉대와 붙어 있는 작은 공간. 소쇄원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라고 한다. 애양단 바로 옆엔 오곡문이 있고, 오곡문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제월당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외나무다리를 지나 제월당 오르는 길목엔 단을 쌓아 매화, 산수유 등 꽃나무를 심어놓은 화계(花階)가 보인다. 그 뒤로 담장이 있고 거기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글자판이 보인다.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로,‘소쇄처사 양산보의 조촐한 집’이라는 뜻이다. 화계를 지나 위로 올라가면 제월당이다. 제월은 ‘비 갠 후의 맑은 달’을 의미한다.

광풍각은 손님을 맞는 사랑채다. 그 앞으로 물길이 흐르고 뒷편으로 제월당이 보인다. [사진=이광표]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짜리 건물이다. 왼쪽 한 칸에는 방을 만들었고 나머지 두 칸은 마루로 트여 있다. 마루 뒷벽에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해 내다보는 뒤쪽 풍경이 매력적이다. 마루에 앉아 앞을 내려다보면 아래쪽으로 광풍각이 보인다.
제월당은 안채다, 소쇄원 주인이 혼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사색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소쇄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광풍각은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다.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계곡물 바로 옆에 석축을 높게 쌓고 거기 광풍각을 올렸다. 그렇게 물길과 바짝 붙어있다 보니 물 흐르는 소리, 물이 떨어지고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물 흐르는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김인후는 ‘소쇄원 48영’에서 광풍각을 ‘침계문방(枕溪文房)’이라고 노래했다. ‘머리맡으로 계곡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비의 방’이라는 뜻으로, 소쇄원의 풍류가 잘 드러난다. 그렇기에 제월당이 정적(靜的)이라면 광풍각은 동적(動的)이다.

막힌 듯 열린 담장으로 흐르는 물과 소통

소쇄원에서는 물길과 담장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소쇄원 공간의 한복판으로 힘찬 물길이 통과한다. 북쪽 장원봉에서 내려온 물길은 담장 오곡문을 거쳐 소쇄원 내부로 들어온다. 오곡문은 계곡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담장 아래쪽을 뚫어 놓은 모습이다. 넓적한 돌을 쌓아 올려 담장의 받침돌로 삼았고 나머지 아래쪽은 뻥 뚫려 있다. 이 담장 밑으로 흘러들어온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오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물줄기는 암반을 지나며 광풍각 바로 앞으로 뚝 떨어진다. 암반을 지나면서 폭포가 형성되는 것이다.
오곡문은 수문(水門)이면서 담장이다. 뚫린 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곡문에서 볼 수 있듯, 소쇄원 곳곳에 있는 담장은 매우 상징적이다. 소쇄원을 두고 열린 공간이라고 하는데 그 열림의 의미는 바로 담장을 통해 상징적으로 구현된다.

제월당 담장의 송시열 글씨판. 소쇄처사 양산보의 조촐한 집이라는 뜻이다. [사진=이광표]

소쇄원을 거닐다보면, 담장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담장은 관람객의 동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담장을 보면 곳곳이 뚫려 있다. 특별히 대문 같은 것도 없다. 오곡문 담장 바로 옆은 끊겨 있는데, 원래는 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사라졌고 그냥 뚫린 채로 내버려두었다, 담장 곳곳엔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와 같은 글자판도 박혀 있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제월당과 광풍각 영역은 그 담장의 구조가 특이하고 그 덕분에 공간구성이 드라마틱해졌다. 제월당은 사색의 공간이고 광풍각과 물길은 자연을 즐기는 공간이기에 서로 분위기가 다소 다를 것이다. 그래서 둘 사이에 담장을 살짝 놓았다. 담장은 기본적으로 두 공간을 구분하기 위함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곳곳으로 뚫려 있다. 제월당 담장의 협문(挾門)을 나서 담을 따라 몇 계단 내려서 광풍각 안으로 들어선다. 제월당에서 광풍각으로 내려가는 그 경사면에 층층 계단처럼 꺾여 내려오는 담장, 그 담장은 어느새 광풍각 앞에서 뚫려 있다.
막힌 듯 열려 있고 열렸다 싶으면 적당히 구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담장의 변화가 리드미컬하고 생동감 넘친다. 고정된 벽이 아니라 움직이는 파티션 같은 느낌을 준다. 어느 건축가는 소쇄원의 이런 담장을 가리켜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소통한다”고 했다. 또 다른 건축가는 “자연지형을 이용한 공간 구성은 지루할 틈이 없다”고 평했다. 양산보의 은일의 삶도 감동적이지만 담장과 함께하는 리듬감도 소쇄원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소쇄원은 양산보와 오리의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 오리를 키우고 있다. [사진=이광표]

한 해가 저무는 지금, 소쇄원에는 아직도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 있다. 광풍각 옆, 대봉대 옆 마찬가지다. 수시로 새들이 떼 지어 날아와 감을 쪼아댄다. 댓바람 소리가 들리고 새들의 푸드덕 소리가 들린다. 소쇄원은 언제 찾아가도 우리의 시청각을 투명하게 한다.
소쇄원에서 오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양산보가 소년 시절 우연히 오리를 쫓게 되었다. 오리를 계속 따라갔는데 그 오리가 다다른 곳이 청명한 물소리와 솔바람 향기 그윽한 곳, 바로 지금의 소쇄원 자리였다고 한다. 소쇄원 입구 매표소 옆 개울에는 오리들이 산다, 양산보와 오리와 소쇄원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 소쇄원 관리사무소에서 키우는 오리들이다. 관리사무소 측에 따르면, 암컷 2마리와 수컷 3마리다. 헤엄치고 날갯짓하는 오리를 보고 있노라면 500년 전 소년 양산보의 해맑은 모습이 떠오른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국립광주박물관 《담양》 통천문화사, 2015.
2. 나명하 외 《園林복원을 위한 전통공간 조성기법 연구 : 명승 제40호 : 담양 소쇄원》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3. 신상섭 《한국의 아름다운 엣 정원 10선》 민속원, 2019.
4. 이옥희 〈김인후 '소쇄원 48영'의 문학적 특징 고찰〉 《韓國言語文學》 제96집, 한국언어문학회, 2016.
5. 천득염 《소쇄원》 심미안, 2019.
6. 허균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다른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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