⓼송강이 살아와 광주호 바라보면 무슨 시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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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입력 2021-12-2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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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원래 서울(한양) 사람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담장 옆에는 그를 기리는 석비가 여럿 세워져 있다.
  정철이 열 살 때인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그 여파로 정철의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 되었다.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鄭惟沈)은 함경도, 경상도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 죽고 말았다. 어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우울한 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16세 때인 1551년 아버지가 해배(解配)되자 정철 가족은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담양의 창평으로 옮겼다. 담양과의 첫 인연이다.  

16세에 담양으로 내려온 송강은 영일 정씨들의 집성촌인 지실마을에 터를 잡았다.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지실마을 표석.[사진=황호택]


  정철이 지냈던 담양 창평은 지금의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정철은 1562년까지 11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여기서 송순(宋純,1493~1582) 김윤제(金允悌,1501~1572)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기대승(奇大升,1527~1572) 임억령(林億齡,1496~1568) 등을 스승으로 모셨고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송익필(宋翼弼, 1534~1599) 백광훈(白光勳, 1537~1582) 등과 교유했다. 그러면서 1560년경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고  27세가 되던 1562년엔 과거에 장원 급제해 관직으로 나아갔다. 

권력투쟁 밀려 4차례 낙향 11년 머물러
  
출사(出仕) 이후 치열한 당쟁과 권력투쟁의 풍파 속에서 정철은 부침을 거듭하며 4차례나 담양으로의 낙향을 감행했다. 1575년, 1579년, 1581년에 담양으로 내려와 1, 2년씩 지냈다. 또 1585년엔 담양에 내려와 1589년까지 5년간 기거하며 한국 문학의 절창인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탄생시켰다. 정철에게 담양은 고향 그 이상이었다. 담양에서 정철은 정치 풍파를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책을 보고 사색하며 빼어난 문학을 창작했다. 동시에 서울의 정치 현실을 향해 부단히 무언가를 모색했다.

지실마을에서 정철의 후손들이 살아온 고택 계당의 편액. 필자가 찾아갔을 때는 수리 중이었다. [사진=이광표]0


  담양으로 내려온 정철은 처음엔 지곡리 지실마을에서 지냈다. 그리고 얼마 뒤 우연히 환벽당(環碧堂)의 주인 김윤제를 만났고 그의 호의 덕분에 줄곧 환벽당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지실마을은 한국가사문학관 바로 뒤편에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속하는데, 원래는 남면이었으나 2019년 가사문학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을 입구에는 지실(芝室)이라 새겨진 커다란 안내표석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수령 300여 년의 은행나무가 나타난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노라면 한쪽으로 대숲이 펼쳐진다. 역시 담양이다.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전해온다. 저 댓잎들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수런거리는 것 같다. 그 대숲 맞은편에 마당이 있는 작은 고택이 있다. 계당(溪堂)이다. 정철의 후손들이 살아온 집. 지금은 지붕 수리공사가 한창이다. 
  계당에서 돌아나와 한국가사문학관을 지나가면 바로 옆 성산(星山, 별뫼)의 끝자락에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바로 그곳이다. 누정과 원림, 가사문학의 본향 담양에서 지곡리 일대는 각별하다.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창계천을 따라 식영정, 독수정(獨守亭), 소쇄원(瀟灑園), 취가정(醉歌亭), 환벽당 등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취가정과 환벽당은 식영정 인근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시에 속한다.

송강가사를 지은 식역정.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사진=이광표]


  식영정을 세운 사람은 문인학자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다. 그는 1560년 지곡리에 서하당(棲霞堂)을 지었고 이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바로 옆 언덕 높은 곳에 식영정을 건립했다. 임억령은 원래 해남 사람이다. 1545년 동생 임백령(林百齡,1498~1546))이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가담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스스로 자책하며 군수직에서 물러나 해남에 은거했다. 이렇게 임억령은 정치관료로 일하기엔 청렴하고 결백했으며 풍류 가득한 인물이었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임억령이 붙였다.‘ 그림자가 쉬어간다’는 뜻이다. 임억령의 문학적 감수성, 낭만과 풍류가 뚝뚝 묻어난다. 면앙정(俛仰亭)과 다르고 송강정(松江亭)과 다르다. 면앙정이 논리적 철학적이라면 식영정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게다가 ‘노을이 머무는 곳’이란 의미의 서하당과 함께 있으니 식영정 서하당 풍경은 여백이 가득한 한 폭의 수묵화를 떠올리게 한다.

식영정에 걸려있는 명사들의 편액들. [사진=이광표]


  임억령의 ‘식영정기(息影亭記)’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 본형을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구부리면 저도 구부리고 사람이 쳐다보면 그림자도 쳐다본다. 어디 그 뿐이랴. 사람의 행동을 따라 그림자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늘진 곳이나 밤에는 사라지고, 밝은 곳이나 낮이면 생겨난다. 사람이 세상에서 처신하는 것도 이런 이치와 같다. 옛말에, 꿈에 본 환상과 물에 비친 그림자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덧없고 무상한 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겨났으므로 조물주가 사람을 희롱하는 것이 어찌 본형과 그림자의 관계에만 국한하겠는가.”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낭만과 풍류를 넘어 철학적 성찰까지 발견하게 된다. 인간사의 번잡함을 넘어서는 무애(無碍)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이 경치 좋고 멋진 이름의 식영정에 쟁쟁한 문인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梁山甫, 1503~1557) 백광훈 송익필 고경명……. 정철이 여기 빠질 리 없다. 특히 김성원과는 각별한 사이였기에 정철은 서하당과 식영정을 즐겨 찾았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 재당숙이었다. 나이는 11살 많았지만 김윤제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여서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식영정에 걸려 있는 송강 정철의 '식영정 잡영' 편액.[사진=이광표]


  이들이 모였으니 시를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억령은 지곡리 성산 일대의 승경 20곳을 골라 ‘석영정 이십영(二十詠)’을 지었다. 그러자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 차운(次韻)하여 각각 20수를 지었고 이들을 합하여 ‘식영정 팔십영’이 되었다. 그래서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두고 ‘식영정의 4선(四仙)’이라 칭하기도 한다.
  1560년 식영정에서 정철은 성산별곡을 뽑아냈다(1561, 1562년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의 나이 25세. 등과(登科)하여 담양을 떠나기 2년 전이다. 정철은 성산별곡 외에도 수많은 시를 식영정에서 지었다. 식영정이야말로 정철 문학의 뿌리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성산 주변의 4계절 풍광과 거기서 노니는 서하당과 식영정 주인 김성원의 풍류를 노래했다.   

'구름이 쉬어가는 정자' 라는 뜻의 식영정 편액. [사진=이광표]


  담양의 한국가사문학관 앞 큰길에서 2,3분 오르면 식영정이 나온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한 정자다. 온돌방을 하나 올렸는데 마루의 한쪽 귀퉁이로 몰아서 배치했다. 서남쪽 4분의 1에 방을 배치하고 4분의 3은 마루다. 이처럼 다소 특이한 배치를 두고 “서남쪽에 배치해 석양을 막고 겨울철 찬바람을 막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김성원이 지은 식영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고 후대에 다시 건축했다. 그런데 언제 중건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식영정에는 편액이 여럿 걸려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단아한 전서체의 식영정 편액이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매력적인 공간에 어울리게 편액 글씨체도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끈다. 현재 걸려 있는 식영정 편액 글씨는 서예가 안규동(安圭東, 1907~1987)이 쓴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한다. 이 외에도 임억령의 ‘식영정기’와 ‘식영정 이십영’내용을 담은 편액, 정철의‘식영정 잡영(雜詠)’의 내용을 담은 편액, 김성원, 고경명, 민덕봉(閔德鳳 1519~1573) 등의 글을 옮겨놓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식영정 아래 평지에 있는 서하당(오른쪽)과 부용당. 최근에 복원했다. [사진=이광표]


  식영정이 서있는 언덕 아래로는 서하당과 부용당(芙蓉堂)이 있다. 김성원이 짓고 살았던 공간이다. 원래의 건물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의 부용당은 1970년대에, 서하당은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서하당 옆에는 정철의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1970년대 지은 장서각 건물이 있다. 
  식영정 일대는 하나의 작은 공원 같다. 벤치도 몇 개 놓여있고‘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고 새겨진 안내석도 세워져 있다. 앞으로는 광주호가 보이고 뒤로는 언덕과 식영정이 병풍처럼 감싼다. 이곳 벤치에 앉으면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젊은 시절 정철의 고뇌가 담긴 성산별곡

  광주호 건너편으론 무등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무등산에서 시작된 창계천이 부지런히 흘러와 지실마을, 독수정, 소쇄원, 취가정, 환벽당을 지나 식영정에 이르고 광주호와 만난다. 광주호는 광주댐을 건설하면서 형성된 인공호수다. 창계천은 왜소해졌지만 광주호 덕분에 식영정 앞의 풍광은 더욱 호방해졌다. 송강이 다시 살아와 저 광주호를 바라본다면 어떤 시를 지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정철은 지곡리와 식영정에서 11년 동안 지내며 자연과 풍류를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출사와 정치, 현실의 한복판을 꿈꾸었다. 그렇기에 성산별곡에는 젊은 시절 정철의 고뇌가 담겨 있다. 담양에서 자신을 추스렸으나 그럴수록 그는 더 큰 세상을 갈망했다.

식영정 옆에 있는 성산별곡 시비[사진=이광표]


  성산별곡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인심이 낫 갓타야 보도록 새롭거늘/세사(世事)는 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엊그제 비즌 술이 어도록 니건나니/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로니/마음의 매친 시름 져그나 하리나다.’ 요즘 말로 풀어보면 이런 뜻이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로운데/세상 일은 구름과 같아 험하고도 험하구나/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주거니 받거니 실컷 마시고 나니/마음에 맺힌 근심 조금은 풀리는구나’
  담양에서 자연과 풍류를 노래했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근심이 자리 잡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 근심은 현실에 대한 미련이자 현실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결국 2년 뒤 정철은 과거에 장원 급제해 서울로 나아갔다. 정치와 현실 속으로 걸어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건 정철의 젊음이었다. 그 첫걸음은 담양의 식영정에서 시작되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뉴파워프리즈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김은희 〈담양의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을 중심으로〉《한국시가문화연구》제35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5 
2. 박연호 〈식영정 원림의 공간특성과 성산별곡〉《한국문학논총》40호, 한국문학회, 2005
3. 신정일 《영산강》 창해, 2009
4. 임준 〈별뫼의 그림자도 쉬었다가는 곳 : 식영정〉《오늘의 가사문학》 제19호, 고요아침,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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