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가사문학의 최고봉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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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입력 2021-12-1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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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미학을 구현한 한글의식

무등산 한 활기 뫼히 동다히로 버더 이셔
멀리 떼쳐와 제월봉(霽月峰)이 되어거늘
무변대야(無邊大野)의 므슴 짐쟉하노라
일곱 구비 한데 움쳐 므득므득 버려는 듯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떨치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이 넓은 들에 무슨 생각 하느라고
일곱 굽이 한데 움츠려 무더기를 벌여 놓은 듯)
-‘면앙정가’ 일부
 

담양군 봉산면 제월봉에 자리한 면앙정. 제월봉 높은 곳 탁 트인 면앙정에서 송순은 면앙정가를 지었다. [사진=이광표]​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닛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이 몸 태어날 때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살아갈 인연, 하늘이 모르겠는가
나 오직 젊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을 비교할 곳 다시없네 )
-‘사미인곡’ 일부
 
강호애 병이 깊퍼 듁님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니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병이 깊어 대숲에 누워 있었더니
관동지방 800리 방면의 소임을 맡기시니
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끝이 없구나)
-‘관동별곡’ 일부
 
송순(宋純․1493~1582)의 면앙정가(俛仰亭歌), 정철(鄭澈․1536~1593)의 사미인곡(思美人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가사(歌辭)문학의 대표작이다. 이것들을 읽다 보면 500년 전 지어진 고전문학은 어렵고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 시발점은 가사의 운율이다. 운율 덕분에 구절구절 입에 착착 감겨 읽어 나가는 데 막힘이 없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하고 고도의 은유와 상징이 탄성을 자아낸다.
 

정철이 성산별곡을 창작한 담양군 남면의 식영정 [사진=이광표]

송순의 가사 면앙정가, 정철의 가사 사미인곡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은 절창(絶唱) 중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그건 한국문학사의 빛나는 성취다. 그런데 이들은 전남 담양에서 탄생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 모두 담양에서 태어난 것이다.
담양은 자타가 공인하는 가사문학의 본향이다. 담양의 가사(담양 사람이 지은 가사, 담양을 배경으로 한 가사)는 모두 18편. 조선 전기(16세기) 때의 가사 6편, 조선 후기(18~19세기) 때의 가사 12편이다.
가사문학은 고려 말 처음 등장해 조선시대에 중요한 문학 장르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가사는 담양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창작되었고 그 주제나 내용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담양의 가사 18편은 현전(現傳)하는 조선시대 전체 가사문학 가운데 지극히 일부다. 그러나 그 의미와 가치에서 담양의 가사문학은 단연 두드러진다. 가사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송순과 정철의 작품이 이곳에서 탄생되어 지금까지 면면히 전승되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담양 곳곳에는 송순과 정철의 창작 공간 등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흔적은 송순과 정철의 가사문학의 미학을 제대로 만나는 중요한 현장이 된다. 가사문학이 창작된 다른 지역과의 두드러진 차별점이다.
 

정철의 사미인곡을 옮겨 적은 서예 작품. 가사문학관 소장 [사진=이광표]

가사문학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와 가치는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국문 정신과 한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는 기본적으로 한글로 창작된 문학이다. 15세기 세종 때 한글이 창제되었지만 양반들은 16세기에도 여전히 한문에 의존했다. 그런 상황에서 양반 사대부가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글을 짓고 그것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송순과 정철로 대표되는 담양의 가사는 조선 전기 국문 정신과 한글 의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담양을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의 사대부들이 우리말 한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개방적 문자 의식’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문자 의식은 과감하고 선진적인 것이다. 용기 있는 도전 정신,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성찰의 발로인 셈이다. 그 결과는 송순과 정철의 가사문학에서 활짝 꽃피었고 그 무대는 담양이었다.
 

면앙정 앞에 서 있는 송순 시가비 [사진=이광표]

송순과 정철의 국문 정신, 한글 의식은 가사 문학의 지속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글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가사는 17,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더욱 대중화되었다. 창작 계층도 양반층을 넘어 전 계층으로 확장되었고 내용도 다양해졌다. 가사가 한글로 쓰이지 않았더라면 어려운 일이었다. 담양은 국문 정신과 한글 의식의 산실이고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고 평가받아 마땅하다.
사미인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관동별곡은 ‘강호애 병이 깊퍼 듁님의 누엇더니’로 시작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가사는 한 행이 4음보로 이뤄져 있다. 이 운율의 효과는 대단하다. 읽다 보면 막힘없이 절로 이어진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게 된다. 이 시적(詩的)인 운율은 우리 민족 고유의 내재적 율격이다. 전통적인 우리말의 관습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쉽게 전달되고 오랫동안 편안하게 기억된다. 가사가 시대를 초월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것도 4음보 덕분이다.
 

가사문학관에 전시 돼 있는 '송강집' [사진=이광표]

4음보 운율은 가사의 중요한 힘이다. 송순과 정철은 이 시적인 운율에 빼어난 어휘와 매력적인 의미를 얹어 한글 문학의 미학을 구현했다. 정철의 가사는 특히 이 대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장 빛나는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평가로 이어진다. ‘가사는 고려 말에 발생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시대의 변화를 흡수하면서 우리 민족의 삶과 의식, 아름다움을 담아온 의미 있는 갈래.’(김은희, '가사문학의 창의적 가치') ‘우리 민족의 미의식의 심층에 잠재하고 있어 얼마든지 현대적 장르로 부흥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김학성, '가사의 양식 특성과 현재적 가능성')

누정은 열린 공간이자 소통의 공간

담양 출신의 송순은 41세 되던 1533년 한양에서 담양으로 낙향해 봉산면의 제월봉(霽月峰) 언덕에 정자를 짓고 면앙정(俛仰亭)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1550년대 초에 이곳에서 면앙정가를 지었다. 어린 시절 10년을 담양에서 지냈던 한양 출신의 정철은 출사(出仕) 이후 관직생활 도중 네 차례나 낙향해 담양에서 지냈다. 1550년대엔 담양 남면 지곡리의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으며 1580년대엔 담양 고서면에 송강정(松江亭)을 짓고 기거하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창작했다. 조선 최고의 가사문학은 이렇게 담양의 누정(樓亭)에서 탄생했다. 누정이라는 공간은 가사문학을 이해하고 담양의 문화와 정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송순과 정철의 가사를 읽어보면 담양에서 성찰하되 담양 밖의 더 넓은 세계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송순과 정철은 어수선한 정치적 혼란기에 중앙 정치에서 물러나 담양으로 낙향했을 때 가사를 지었다. 그것이 자의였든 타의였든 성찰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착과 안주보다는 외부 세계를 향한 열망을 담고자 했다. 담양의 풍광과 함께하되 담양에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나아가려는 내용을 담았다. 그래서 담양의 가사를 두고 ‘개방성의 문학’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식영정에서 내려다본 광주호 [사진=이광표]

이러한 개방성은 송순과 정철이 누정에서 가사를 창작했다는 점과 연결된다. 누정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 소통의 공간이다.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은 자그마한 누정이지만 한가운데에 작은 방이 있고 빙 둘러가며 마루로 트였다. 한쪽으로 막힘이 없이 사방으로 온전하게 열린 공간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송순과 정철은 누정에서 담양과 호남의 사림들과 교유하며 시문(詩文)을 짓고 미래를 고민했다. 면앙정이나 송강정, 식영정에 오르면 사방이 눈에 확 들어온다. 추월산, 영산강, 광주호 등 먼 곳으로 시선이 닿는다. 송순과 정철은 그 너머의 곳까지 꿈꾸었고, 그것이 면앙정가, 사미인곡으로 구현되었다.
담양의 가사문학은 이렇게 개방적이다. 그것은 담양에 어린 도도한 정신이기도 하다. 무등산에서 뻗어 나온 우직한 기상은 담양의 제월봉에서 면앙정과 만나고, 담양에서 발원하여 나주 목포를 지나 서해로 이르는 영산강은 식영정과 정철의 가사를 만났다. 그래서인지 송순과 정철의 가사는 유려하고 막힘이 없다. 담양의 가사는 무등산과 영산강을 닮았다. 담양의 가사는 열린 문학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현재적이고 우리 시대로 이어진다. 담양의 진정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가사의 명칭에도 그 정체성과 철학이 담겨 있다. ‘歌’는 노래하는 것이고 ‘辭’는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노래와 말, 글이 하나로 만나 가사로 태어났다. 시적인 산문, 노래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융합이고 조화다. 다소 다른 것, 다소 낯선 것이 하나로 만나 새로운 장르로 나아간 것이다. 융통성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이것이 가사의 본질이고 철학이다.
 

식영정 바로 앞에 위치한 한국가사문학관 [사진=이광표]

가사문학은 전통 문학 장르 가운데에서도 남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려 말 가사가 등장한 이래 조선 말기에 이르면 폭넓은 지역에서 창작이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에도 활발하게 창작이 이뤄지고 많은 사람들이 향유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하는 가사는 수천 편에 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 작품 세계나 주제도 매우 다양하다. 그 지속성의 결정적인 계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극적으로 구현한 송순과 정철의 가사였다.

송순·정철은 가사문학의 정점

담양지역엔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등 송순과 정철의 가사문학 창작 공간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가사 문학이 탄생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담양만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담양의 가사문학은 누정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누정 문화는 담양지역 사림의 원림(園林) 문화와 어우러지면서 담양의 또 다른 매력으로 자리 잡았다.
송순과 정철의 가사를 읽다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고전문학이 어디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고품격이면서 대중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그래서 담양의 가사문학 전통은 현대적이고 또 현재적이다. 담양에 가면 지금도 사람들이 가사를 읽고 가사를 짓는다. 담양은 그런 곳이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김은희 〈담양의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을 중심으로〉 《한국시가문화연구》제35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5
2. 김은희 〈가사문학의 창의적 가치〉 《한국시가문화연구》제37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6
3. 고순희 〈가사문학의 문화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 《한국시가문화연구》 제37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6
4. 박준규 최한선 《담양의 가사 문학》 담양군, 2001
5. 이상원 〈문학, 역사, 지리-담양과 장흥의 가사문학 비교〉 《한민족어문학》 제69집, 한국어문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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