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내 마을에서 월봉산 쪽으로 2km 가면 유천(柳川)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성 전투에서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 장군과 함께 전사한 둘째 아들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1561~1592)의 종가와 사당, 묘소가 있다. 큰아들 종후(從厚·1554~1593)는 이듬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했다. 3부자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의 집안이다.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 의병부대와 권율(權慄·1537~1599) 장군 등이 이끄는 민관(民官) 연합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패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예기(銳氣)를 꺾음으로써 호남의 중심인 전주 점령을 좌절시키고 곡창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경명은 광주 포충사에, 종후는 포충사와 진주의 충민사에 배향됐다. 학봉 고인후의 사당과 묘소가 유천에 마련된 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유천 마을은 학봉의 처가 동네다. 인후는 세 자녀를 집에 두고 32 세의 나이로 전선에 나갔다. 졸지에 인후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자 장모 언양 김씨가 외손자들을 유천으로 데리고 와 키웠다. 학봉은 장흥 고씨였지만 그의 후손이 외가 창평에서 뻗어나가 ‘창평 고씨’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유천마을 종가 뒷산에 있는 학봉 묘역은 후손과 마을사람들이 정갈하게 관리하고 있다. [사진=황호택]


학봉의 종가 바로 뒤에 나지막한 산이 있다.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의 지맥에 키 큰 소나무 수십 그루가 묘소를 둘러싸고 있다. 석물은 묘표, 상석, 망주석 두 개, 동자석 두 개로 단출하지만 규모는 왕릉에 손색이 없는 무덤이다. 학봉이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열(毅烈)이란 시호를 받은 내용이 굵은 글씨로 묘표에 새겨져 있다.

한말 의병장 고광순은 임진왜란 의병장 후손   
을사늑약이 강압으로 체결된 뒤 호남지방에서는 1907년 고경명의 12세 손이자 둘째 아들 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인 녹천(鹿川) 고광순(髙光洵·1848~1907)이 60대의 나이에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고경명 장군이 항일의병을 일으킨 지 315년 만이었다. 녹천은 남원성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구례 연곡사로 가서 화개동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군사를 훈련시키며 군량을 보충했다.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씨를 쓴 태극기를 제작해 아침저녁으로 불원복기에 배례하며 의병들을 격려했다. 불원복은 나라를 곧 회복한다는 뜻이다. 불원복기는 네 괘와 태극의 모습이 지금의 태극기와는 조금 다르다. 종가에는 모사본이 있고 원본은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녹천은 그해 9월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연곡사 입구에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서 있다.
녹천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일제는 가족들을 핍박하고 창평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때 수백 년 동안 간직해오던 학봉 종가의 귀중한 고서와 유품들이 불탔다. 일본 헌병들은 유천마을 사람들을 녹천의 집으로 불러 모아 숨어 있는 장소를 대라고 위협했다. 녹천의 아들이 저항하자 사타구니를 칼로 찔렀다. 하체에 피가 낭자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몸이 됐다. 장흥 고씨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1939년 생인 고영준이 고광순의 손자로 입적했다.

고경명의 12세손으로 한말에 항일 의병투쟁을 벌인 고광순을 배향하는 포의사.[사진=황호택]


녹천을 배향하는 사당 포의사(褒義祠)는 원래 운암저수지 옆에 있었으나 터가 비좁고 습기가 차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담양군이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11대조 고인후 장군의 묘소에서 300m 떨어진 곳이다.
한 집안에서 불천위(不遷位) 신위를 사당에 세 분이나 모신 것은 학봉·녹천 종가가 유일하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를 말한다. 필자가 종가를 찾아갔을 때 고영준(82)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만나볼 수 없었다. 대신에 종부 이숙재 씨를 만나 집안 이야기를 들었다.
 종부는 스물다섯 살에 남원에서 시집을 왔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조상들을 모시는 일이 힘든 종가로 시집가는 게 솔직히 싫었지만 영준 씨에게 끌렸던 모양이다. 보통 집안에서는 5대가 넘으면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고 종중에서 공동으로 시향을 지내지만 학봉·녹천 종가에서는 두 분의 불천위에다 고조까지 제사를 모시다 보니 제사가 끊이는 달이 없었다. 학봉과 녹천의 제일에는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과 제사를 모시고 음복(飮福)을 했다. 나중에는 돼지를 잡는 것으로 규모를 줄였다가 코로나가 내습한 뒤에는 집안사람끼리만 모여 제사를 지낸다.

학봉과 녹천의 종가. 집 바로 뒤에 학봉의 사당이 있다. [사진=황호택]


학봉·녹천 종가에는 선대로부터 씨간장이 내려온다. 몇 백 년이 된 것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간장은 오래되면 수분이 말라 응고된 간장과 소금성에가 항아리에 달라붙는다. 그러기 전에 새 간장을 조금 부어 희석해야 한다. 그리고 새 간장을 만들 때도 씨간장을 상징적으로 조금 섞는다. 옛날에는 종가의 씨간장을 귀한 맛으로 여겼으나 지금은 입맛들이 많이 변해 짠 것이라면 고개를 들린다. 이 숙재 종부는 일반 음식에는 씨간장을 넣지 않고 색깔을 낼 때만 쓴다.
이 씨는 음식 솜씨가 좋아 2015년 농촌진흥청과 플라자 호텔이 공동으로 전국의 종가음식을 발굴하는 행사에서 12개 맛집종가로 선정됐다. 잘하는 요리는 떡갈비. 옛날에 이가 약하거나 없어 갈비를 먹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만든 음식이다. 종부는 레시피의 공개를 꺼렸다. 대체로 담양에서 만드는 떡갈비의 조리법은 우선 갈비살에서 피를 빼내고 살을 발라내 마늘 생강을 넣고 다진다. 그다음에는 버섯, 대파, 양파, 텃밭에서 나오는 계절 채소와 두부 등을 넣고 버무린다. 이것을 뼈에 붙여서 약한 화롯불에 굽는다. 종부는 식당을 차리지는 않았지만 20명 넘는 단체 손님이 며칠 전에 주문하면 종갓집 상차림을 해준다.

新지식 가르치는 교육 구국
삼지내 마을에 고택이 있는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1863~1933)는 고경명 의병장의 11세 손이다. 구한말에 정3품에 올라 규장각 직각을 지냈다.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에 해당한다. 춘강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고광순과는 달리 그는 근대 교육을 통한 실력 배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국가의 독립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같은 고경명의 줄기 안에서 삼지내와 유천 마을의 후손들의 가는 길이 달라진 것이다.

1830년대 건축된 2층 누각 남극루는 창평 동헌 자리에 있다가 191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마을 사람들은 양로정이라고 부른다. [사진=황호택]


을사늑약 전문(前文)에는 한국의 부강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조약의 효력을 약정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을사늑약은 토씨만 우리말로 된 의고문(擬古文)이다. 전문을 쉽게 풀어보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 주의(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조문을 약정한다’고 돼 있다. 부강지실은 실제로 부강하다는 뜻이다.
당시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이를 우리가 부강해진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오산, 대성 학교 등 민족주의 계통의 학교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것도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깨우쳐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독립을 이루자는 뜻이었다. 부강지실 운운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한 일본의 둔사(遁辭)였지만 군사력 외교력으로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서 교육을 통한 부강한 나라 만들기는 호소력이 있었다.

춘강 고정주는 창평 고씨들의 공부방인 상월정에 영학숙을 개설하고 아들과 사위, 친구의 자제를 학생으로 받아 영어 등 신지식을 가르쳤다. [사진=황호택]


고정주는 앞서나간 지식인이었고 온건 개화파에 속했다. 고정주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시작한 첫 사업이 가문이 소유한 상월정(上月亭)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상월정은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공부터다. 원래 고려시대 때부터 대자암이라는 절이 있었다. 1457년 강원감사 김응교가 상월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로 바꾸었다. 언양 김씨 400년, 사위 함평 이씨 300년을 거쳐 외손자인 고씨 학봉파들에게  내려가면서 고씨 가문이 자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썼다.

상월정에서 만난 송진우와 김성수
춘강은 상월정을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학숙(英學塾)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 귀화인 이표(李瀌)를 초빙해 영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장차 둘째 아들 고광준(1882~1950)과 사위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의 유학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이표는 영어 일어 등 외국어뿐 아니라 수학 역사 지리 체육까지 잘하는 만능교사였다. 얼마 후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가 합류했다. 송진우는 17km가량 떨어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출신이었으나 아버지가 춘강과 친분이 있어 상월정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만난 김성수와 송진우는 입술과 이의 관계 같은 평생동지가 되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988~1964)와 백관수 현준호도 상월정을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송진우는 영학숙에 온 지 6개월 만에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고하는 당시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오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을 때마다 눈물을 뿌리며 비분강개했다고 한다. 인촌도 그해 겨울 고향인 전북 고창의 인촌리로 돌아갔다. 
영학숙 학생 중 고광준이 1906년 중국 상하이로 먼저 유학을 떠나고 2년 후에는 김성수와 송진우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고광준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들과 합류했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대성통곡을 하던 송진우는 홀로 귀국했고 김성수만 일본에 남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1914년 졸업했다.

창흥의숙 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창평초등학교 안에 서있다. [사진=황호택]                                        

 

 

상월정에 방치돼 있던 오층석탑이 창흥의숙 교사 옆으로 옮겨졌다. [사진=황호택]


춘강은 1908년 영학숙을 창흥의숙으로 확대 개편했다. 상월정은 산속에 너무 떨어져 있어 학생들의 등하교가 힘들었다. 창평객사 건물을 수리해 창흥의숙 교실로 썼다. 학생 수는 50명이었고 초등과는 3년, 고등과는 6개월의 속성과정이었다. 창흥의숙은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며 점심도 무료로 제공했다. 춘강은 결석한 학생의 집에 머슴을 보내 학교를 나오게 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와 창평의숙의 관계에 대해서는 각기 평전을 쓴 김진배 김학준 한인섭의 기술이 다르다. 가인으로부터 직접 구술을 받아 쓴 김진배는 가인이 인촌과 고하를 알게 된 것은 춘강이 세운 창흥학교 수학(修學) 시대였다고 기록했다. 가인은 외가가 창평의 고씨였고, 고향인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담양의 추월산이 바라다보였다.
김학준은 가인 평전에서 ’가인은 21세의 청년으로 이 학교의 고등과 즉 6개월의 속성과에 다녀 영학숙에 적을 둔 고하나 인촌과 함께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고정주의 같은 문하생이라고 쓰고 있다. 가인은 고하나 인촌보다 3,4세 위였다. 한인섭은 가인이 춘강의 교육구국 운동에 동참하여 1908년 창흥의숙의 설립시기부터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인을 학생이자 숙장(塾長) 춘강과 뜻을 같이 하는 지사로 본 듯하다.
창평의숙 자리에 서 있는 창평초등학교에는 그 흔적을 알리는 상징물이 두 개 남아 있다. 상월정에는 대자암의 유물인 5층 석탑이 있었으나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석탑을 창평객사(지금의 창평초등학교 정문)로 옮겼다. 현재 창평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이 석탑의 표지판에는 상월정에서 옮겨온 이력이 적혀 있다. 창평초등학교에는 ‘창평의숙’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도 서 있다.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2021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이길용 여운형 송진우를 선정했다. 해방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국민대회준비위원회(국준)로 맞섰던 좌우파의 인물이 함께 선정된 것은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고하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인촌이 인수한 중앙학교 교장을 지냈다. 1918년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 3·1운동의 산파 역할을 했다. 3·1운동 44인 중 한 사람으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6년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다음 해 2월 출옥하였다.
1936년 8월에는 동아일보가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해 무기정간을 당하자 고하는 총독부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직을 사임했다. 태평양전쟁 전후에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협력을 강요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드러누워 협력하지 않다가 광복을 맞았다.

담양이 배출한 애국지사 송진우의 생가는 초가 지붕이라 매년 이엉을 갈아야 한다. 집 뒤에 고하 송진우 기념관이 있다. [사진=황호택]


 고하는 여운형 박헌영의 건준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이에 맞서 1945년 9월 7일 국준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해 상해임시정부 법통론(法統論)을 폈다. 9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됐으나 12월 30일 자택에서 찬탁 세력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정치적 암살이었다.
송진우 고택(지금의 금성면 대곡리)은 한말 호남의병의 영수였던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1852~1908)의 은신처이자 강학 현장으로서도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닌다. 기삼연은 1차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이곳에서 은거했다. 은거 중 기삼연은 송진우를 가르쳤고 후일의 의병활동을 구상해 3차 의병의 중심역할을 했던 호남 의병을 일으켰다. 
 송진한 고하 기념관장(전남대 명예교수)은 "고하는 중농(中農)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이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초가지붕이지만 곳간이 3칸인 것을 보면 고하 집안의 겸손 어법같다.  인촌이 도와주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으로 보면 부농(富農) 수준이었을 것이다.   
 뒤에는 고하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있다. 고하 집 마루에 앉으면 고비산(古飛山) 마루가 보인다. 고하(古下)라는 호는 의병장 기삼연이 “고비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니 고비산같이 꿋꿋하게 살라”며 지어준 이름이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고영진 홍영기 《義香의 고장 담양》 담양군, 2004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고하 송진우 전집》 동아일보사, 1990
권오기 편집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김진배 《가인 김병로》 가인기념회, 1983
김학준 《가인 김병노 평전》 민음사, 2004
남시욱 《고재욱 평전》 동아일보사, 2021
이현희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 나남, 2009
최혁 《담양 창평과 장흥고씨 충절의 역사》 AI 타임스, 2020.8.25
한인섭 《가인 김병로》 박영사, 2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송진우)》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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