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⓽ 정치와 문학의 기묘한 만남, 정철과 송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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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입력 2021-12-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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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쉰 나이에 낙향해 5년 세월을 보낸 송강정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쓴 것이 1560 년경. 2년 뒤인 1562 년, 스물일곱의 정철은 과거에 장원 급제해 관직으로 나아갔다. 그의 무대는 서울(한양)로 옮겨졌다. 당시 명종과 선조 연간은 붕당이 치열한 시절이었다. 정철은 비교적 승승장구하면서도 번번이 탄핵과 파직으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고 그때마다 담양을 찾았다.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낙향을 거듭한 것이다. 그 사이 강원도 관찰사 시절인 1580년경에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다.
  1584 년 49세 때엔 대사헌의 자리에 올라 선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은 율곡(栗谷)이 타계(1584 년)한 이후 동인의 탄핵을 받았다. 1585 년 지명(知命)의 50세였다. 탄핵 당한 정철은 대사헌 자리를 내려놓고 담양의 창평으로 내려왔다. 네 번째 낙향이었다. 1589 년까지 5년 동안 머물렀으니 길다면 긴 세월이었다.

송강정 측면의 죽록정 편액[사진=이광표]


  이때 그는 담양 창평의 죽록천(竹綠川)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지냈다. 이미 있던 죽록정(竹綠亭)을 고쳐 짓고 송강정(松江亭)이라 이름 붙였다.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이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담양에서 정철은 안정을 되찾았다. 창평의 풍광과 인심을 통해 따스함을 만났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은 복잡다단했다. 임금이 그리웠고 정치와 권력이 아른거렸다. 
  송강정에 머무는 동안 정철은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었다. 정철은 사미인곡을 통해 선조에 대한 연군(戀君)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했다. 선조를 향한 그리움이 시종 절절하게 흐른다. 사미인곡 가운데 봄을 노래한 대목.
   
  동풍(東風)이 건듯 부러 젹셜(積雪)을 헤텨내니
  창(窓) 밧긔 심근 매화 두세 가지 픠여셰라
  가득 냉담(冷淡)한데 암향(暗香)은 므슨 일고
  황혼의 달이 조차 벼마테 빗최니
  늣기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아니신가
  뎌 매화 것거 내여 님 겨신 데 보내오져.
  님이 너를 보고 엇더타 너기실고.

    

송강정과 수문장처럼 앞에 서있는 커다란 노송, [사진=이광표]


  이 대목을 현대어로 풀이하면 이렇다. ‘봄바람 문득 불어 쌓인 눈을 녹여 헤쳐내니/ 창 밖에 심은 매화 두세 송이 피었구나/ 가뜩이나 차갑고 담담한데 그윽한 향기는 어쩐 일인가/ 황혼의 달이 쫓아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흐느껴 우는 듯 반가워하는 듯 하니, 이 달이 임인가 아닌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구나/ 임이 너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
  소리 내어 읽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 서늘한 그림 속으로 한 여성의 절절함이 시리도록 극명하게 드러난다. 저 비유와 회화적 표현이 읽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말의 구사 능력에 있어 정철은 독보적이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그 정점에 있다. 구운몽(九雲夢)의 작가 김만중(金萬重)이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세 편뿐"이라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사미인곡은 속편인 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미학을 잘 살린 한국문학 최고 절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송강정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산실이다. 1585년 정철이 원래 고쳐지었던 송강정은 정철이 죽고 난 뒤 허물어지고 폐허가 되었다. 송강정이 사라진 죽록천 언덕에는 무덤이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 2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1770년 정철의 후손들이 언덕의 무덤을 옮기고 소나무를 심은 뒤 송강정을 다시 지었다. 이후 1955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나무들이 송강정을 향해 휘어져 있다. [사진=이광표]

  송강정 주변에 대나무도 있지만 소나무가 더 두드러진다. 송강정으로 오르는 길 주변의 소나무들을 보니, 특이하게도 정자 쪽을 향해 많이 기울어져 있다. 어떤 것들은 기울어져 쓰러질 것 같다. 어찌 보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도도한 물결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다. 송강의 삶과 문학에 예의를 갖추려는 것일까.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대목에서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 장릉(莊陵)이 생각난다. 장릉에 가면, 봉분(封墳) 아래쪽 평지에 심겨진 소나무들이 한쪽으로 좀 굽어 있다. 이를 두고 소나무들이 언덕 위쪽 단종의 봉분을 향해 머리 숙여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식물학적으로 설명하면 소나무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기 위해 햇볕을 많이 받으려고 나무가 적은 정자나 묘소 쪽으로 기울어진 현상이다.   
  정자는 크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 가운데에 방을 배치했고 앞과 좌우로 마루가 있다. 정면에는 송강정 편액이, 측면에는 죽록정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송강정 앞에 우뚝 솟은 커다란 노송 한 그루도 인상적이다. 송강의 후손들이 심은 소나무일 텐데, 송강정 건물과 잘 어우러져 이제는 송강정의 상징이 된 듯하다. 송강정 마당 한편에는 1969년 세운 정철 시비가 서 있다.  

송강의 시 네 편을 적어놓은 편액.[사진=이광표]



  송강정 마루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송강의 시 4편을 옮겨놓은 편액도 눈에 띈다. 그 맨 앞의 시는 ‘숙송강정사(宿松江亭舍)’, ‘송강정에 묵으며’란 뜻의 제목이다. 그 내용은 ‘借名三十載 非主亦非賓 茅茨纔蓋屋 復作北歸人(차명삼십재 비주역비빈 모자재개옥 부작배귀인)’이다. 뜻은 이렇다. ‘남의 이름 빌려 쓴 지 서른 해/주인도 아니고 또한 손도 아니라네/띠풀로 겨우 집을 덮고는/다시 짓자 그 사람은 등지고 돌아가네.’이 가운데‘등지고 돌아간다’는 대목이 놀랍다. 죽록정을 고쳐 짓고 곧바로 떠나겠다는 정철의 마음을 내비친 것이다. 정철은 담양에서 은거하면서도 이렇게 늘 서울과 정치를 꿈꾸었다. 
  송강은 담양의 자연과 함께하면서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권력 의지를 문학적 미학으로 드라마틱하게 구현해냈다. 이러한 특징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연군(戀君)의 노래이지만 그 본질은 정치이면서 귀거래(歸去來)다. 그런데 정치와 귀거래는 서로 어긋나는 데도 송강은 그 모순을 문학적으로 멋지게 구현했다. 둘 사이의 긴장은 시종 정철의 삶으로 이어졌고 그렇기에 정철의 문학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매력적일 수 있었다. 정철에게 송강정에서의 5년은 정치적 시련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5년 동안 정철이 송강정 마루에 오르내릴 때마다 밟은 댓돌. [사진=이광표]


  사미인곡의 마지막 부분인 결사(結詞)는 이러하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셜흔 날/ 져근덧 생각 마라 이 시름 닛쟈 하니/ 마음의 매쳐 이셔 골슈(骨髓)의 깨텨시니/ 편쟉(扁鵲)이 열히오나 이 병을 엇디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 데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르샤도 내 님 조츠려 하노라’
  현대어로 풀어 보면 이런 뜻이 된다.‘하루는 열두 시간, 한 달은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시름 잊으려 하니/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찌 하리/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 호랑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곳마다 앉았다가/ 향기 묻힌 날개로 임의 옷에 옮아가리라/ 임이야 그 호랑나비가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끝까지 임을 따르려 하노라.’

'송강 정선생 시비'는 1969년 세웠다. [사진=이광표]


  임을 향한 정철의 열망은 드디어 실현되었다. 송강정에서의 생활이 5 년째로 접어들던 1589년 말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터지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정여립 사건의 전모를 조사하는 책임자가 되어 다시 화려하게 정계로 복귀한 것이다. 권력을 다시 손에 쥐었으나 그것도 몇 년 가지 못했다. 또다시 파직과 유배를 거듭한 끝에 1593년 58세의 나이에 강화도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쳤다. 
  정철의 개인사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부침을 거듭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철은 문제적 인물이다. 특히 정치와 문학의 거리를 생각해볼 때 더욱 그렇다. 이토록 아름다운 한국문학을 창작한 인물이 이렇게 처절한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다니. 
  송강 정철의 문학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담양의 식영정에서는 송강의 20대가 떠오르지만 송강정에 오르면 송강의 50대가 떠오른다. 정철은 더욱 절실했기에 한층 더 원숙하고 멋진 절창을 뽑아냈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더 쓸쓸하게 다가온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권력의 봉우리가 높을수록 그 골짜기도 더 깊어졌기 때문이리라.

송강정 정면의 당호 편액.[사진=이광표]


 쓸쓸한 연정과 권력에 대한 열망
 송강정에서 휘어진 소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죽록천 쪽을 내려다본다. 바로 앞 주차장 건너편에 커다란 대형 숯불갈비집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갈비집을 드나든다.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면서 속미인곡의 한 대목을 읊조려본다. ‘님다히 쇼식(消息)을 아므려나 아쟈 하니/오늘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내 마음 둘 데 업다 어드러로 가쟛 말고’. 지금의 우리말로 풀어 보면‘임 계신 곳의 소식을 어떻게 해서라도 알려고 하니/ 오늘도 거의 저물었구나, 내일이나 소식 줄 사람이 올까/ 내 마음 둘 데 없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의미다.
  감상자에게는 쓸쓸한 연정으로 다가오지만 정철에게는 절규에 가깝다. 권력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기도 하다. 정치와 문학이 이렇게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만난 사례가 또 어디 있을까. 송강정에 오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담양과 송강정은 이렇게 독창적인 한국문학의 산실이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김형식)·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김은희 〈담양의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을 중심으로〉《한국시가문화연구》제35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5 
2. 김세곤 《송강문학기행》, 열림기획, 2007
3. 박경남 〈「사미인곡」의 향유 맥락과 중층구조〉 《규장각》제24집, 서울대 규장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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