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심서 2021] ① 증오의 벽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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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교수(정치학)
입력 2021-10-0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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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넓은 시야를 가진 리더, '포용의 대통령'을 뽑자

[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교수]



대선을 5개월 앞두고 차기 대통령은 부디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할 지도자이기를 소망한다. 이젠 ‘분열과 증오의 굿판’을 거둘 때도 됐다. 언제까지 온 나라가 내편, 네 편으로 갈려 철천지원수 대하듯 미워하고 싸워야 하는가. 증오의 땅에선 민주주의도, 국가 발전도, 개인의 행복도 기대할 수 없다. 증오는 이성적 논의와 판단을 가로막아 모두를 희생자로 만든다.

증오 문제 전문가인 미국의 러시 W. 도지어 주니어(Rush W. Dozier, Jr)는 저서 (번역서명,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2002년)에서 증오를 극복하려면 “넓은 시야를 가진 지도자”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모한다스 간디와 마틴 루서 킹, 아일랜드 평화협정 체결의 주역으로 노벨평화상(1998년)을 받은 존 흄을 예로 든다. 간디와 킹은 증오가 증오를 낳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고, 흄은 감정이입과 공감대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시대가 이런 고통을 겪는 마지막 시대일 것”임을 확신시켰다고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포용적 리더십’을 국정의 핵심으로 천명하고 나선 건 문재인 정권이다. 대표적 브레인인 성경륭 전 한림대 교수(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를 비롯해 일단의 지식인들은 2016년 포용국가연구회를 만들었고, 이 연구회는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의 선거대책위에서 포용국가위원회란 이름으로 활동한다. 당시 그들이 펴낸 '포용국가'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자는 문 정부의 국가 비전과 리더십에 관한 청사진이었다.

말뿐이었던 ‘포용의 리더십’

“우리가 추구하는 나라다운 나라는 약자를 포용하고,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포용국가다··· 포용적 리더(지도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편견 없이 다양한 견해를 고려하며··· 사람과 조직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우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고유성을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하면서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포용의 리더십(Inclusive leadership)은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담겼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허나, 말뿐이었다. 대통령은 오히려 국민을 갈라치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지자들이 ‘내편’이 아닌 다수 국민을 ‘토착왜구’로 몰 정도였으니, 포용이란 말이 무색했다. 오늘날 한국정치를 특징짓는 ‘증오의 정치’는 구호뿐인 포용 탓이 크다.

차기 대통령은 ‘편 가르기’의 유혹과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적극적 조정자(coordinator)가 되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반면교사다. 그동안 대통령은 민감한 현안 앞에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국 사태는 물론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간 초유의 알력 사건 앞에서도 침묵했다. 여권 인사들은 “대통령이 나서면 더 시끄러워진다”고 했지만, 그래서 얻은 건 갈등의 장기화와 증오의 심화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침묵했지만 그의 마음이 어느 편에 가 있는지를 국민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위장된 침묵, 의도적 방관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대통령학의 권위자인 함성득 교수(경기대 정치전문대)는 “차기 대통령은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명령자’가 아니라 국회와 소통하고 반대편을 포용하는 정치적 ‘조정자’ 역할을 하는 개방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했다(서울신문 2021년 7월 27일). 공감한다. 이 시대, 한국의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최우선의 덕목이 이거라고 나는 믿는다. 조금 진부하지만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으로 정의한 사람은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1917~2014)이다. 그가 언명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은 ‘정치적 조정자로서의 대통령의 적극적 역할’과 다르지 않다. ‘배분’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대통령, ‘윤리적 개입’ 회피해선 안 돼

진중권 교수는 이를 ‘대통령의 윤리적 개입’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윤리는 자기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정해주는 기준을 통해··· 가장 잘 알려진다”는 S.C. 길먼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 대통령은 그렇게 중요한 임무(기준 제시와 윤리적 개입)를 남에게 내준 채 포기해 버렸다”고 했다. 예컨대 민주당에서 ‘위성정당’이란 꼼수로 ‘정치개혁'(선거법 개정)의 대의를 파괴해도 “대통령의 윤리적 개입은 없었다는 것이다(진중권,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2020년). 민노총의 각종 불법, 일탈행위에 대해 방관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도, 이 정권 하에서 유달리 잦았던 ‘정치의 사법화’ 현상도 대통령의 침묵과 결코 무관치 않다.

흔히 21세기를 ‘증오의 시대’라고 한다. 전쟁, 종교, 인종, 양극화 등을 둘러싼 갈등이 증오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증오 앞에 민주주의는 너무 허약해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Jacques Ranciere)가 저서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2005년)에서 “지구상에는 오직 하나만의 선한 민주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 만들어낸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많은 걸 시사한다.

<역사의 종언>(1992년)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스탠퍼드대)가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2021년 1·2월호에 ‘기술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How to Save Democracy from Technology)'라는 글을 다른 교수들과 함께 공동 기고했다. 이들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 등 거대 인터넷 플랫폼 기업들이 정치적 의사소통(political communication)을 장악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보고 “이들 플랫폼 대기업과 소비자들(users) 사이에 중간 장치로 미들웨어(middleware)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SNS 시대의 새 리더십, ‘증오 걸러내기’

일종의 소프트웨어인 미들웨어를 깔아 가짜뉴스, 증오발언(hate speech), 악플 등을 걸러내자는 얘기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난해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퀴아논(QAnon) 같은 극우 음모론자들의 준동도 막고, 장기적으로 거대 플랫폼 기업들의 견제 받지 않는 권력에도 대처하자는 것이다. 이들의 제안은 디지털 시대에 정치의 위기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를 미리 보여준다. 앞으로 ‘증오 걸러내기(hate filtering)'가 정치지도자의 전통적 리더십에 추가되어야 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의 덕목이 될 수도 있겠다.

증오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념, 정치, 세대, 빈부 등 모든 영역에서 갈등이 중첩·혼재돼 있다. 배고픈 것보다 배 아픈 것을 못 참는 정서도 유별나다. 정보와 지식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는 최첨단 SNS 국가이기도 하다. 증오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엔 이보다 좋은 토양이 없다. 증오는 재생산된다. 증오심을 부추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증오상인(hate-monger)들이 차고 넘친다. 증오를 걸러낼 수 있는, 증오에 휘둘리지 않을 포용적 열린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포용의 리더를 중심으로 국민 통합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포용’의 결과여야 할 통합에 대해선 어떤 의미 있는 실천방안도 내놓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때는 ‘통일’이란 말이 금기어가 되더니 이 정권에선 ‘통합’이 금기어가 된 느낌마저 주었다. 하긴 다수 국민을 ‘친일파’나 ‘토착왜구’로 보았으니, 그들이 편 가르기의 대상은 될지언정 통합의 대상은 아니었을 게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 있기도 했고.

권력, 증오, 권위를 부순 세 대통령

노무현 정권 말인 2006년 10월,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사회학회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갈등구조와 국민통합’을 주제로 공동학술회의를 열었다. 우리 사회의 3대 갈등(이념, 세대, 계층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실증적 분석과 균형 있는 논의가 돋보였지만, 참여자들은 “갈등구조를 넘어설 국민통합의 방향과 정책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겸양의 말이었겠지만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사회학계의 원로인 임희섭 교수(고려대)는 “다행히 한국사회에는 인종, 민족, 종교 갈등과 같은 원초적 집단 간의 갈등이나 근본주의적 종교집단 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계층갈등이 계급갈등으로 이념화·급진화될 가능성 △노조 등 이익집단의 집단행동이 폭력화될 가능성 △지역 간 불평등이 원초적 지역감정으로 발전될 가능성 등을 우려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솔직히 감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뭘 의미하는가. 다른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보다도 최고 지도자, 곧 대통령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갈등과 증오를 얼마든지 완화·해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역대 대통령 중 김영삼은 ‘권력’(TK와 軍)을 부숨으로써, 김대중은 ‘증오’(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를 떨쳐냄으로써, 노무현은 ‘권위주의’를 타파함으로써 통합에 기여했다고 나는 본다. 차기 대통령도 그런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이기를 소망한다. 노무현의 적자로서, 이들 세 대통령의 신념과 유산을 딛고 서 있는 문 대통령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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