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고독과 죽창, 두 갈래로 벋은 광주의 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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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7-0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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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정신] ⑪ 시인 김현승과 김남주를 품어 꽃 피운 땅

시인 김현승

시인 김남주

광주시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학엔 시인 김현승(金顯承 1913∽1975년)의 시비가 있다. 젊은 날, 누구나 애송했을 시(詩), 「가을의 기도」가 새겨져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거기서 승용차로 30분, 전남대학교 캠퍼스 인문학관에는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년) 기념홀이 있다. 홀의 벽면에 시, 「조국은 하나다」가 쓰여 있다.
‘…권력의 눈앞에서/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조국은 하나다/….’

이 두 시인을 동시에 불러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시의 성격이나, 현실적인 시사적(詩史的) 위상의 차원에서 그게 가능한지가 우선 마음에 걸렸다. 김현승은 대체로 기독교적 사유에 기초한 ‘고독의 시인’ ‘관념의 시인’으로 불린다. 반면 그보다 한 세대 아래인 김남주는 시인의 현실참여를 행동으로 보여준 시인이다. 두 사람을 수평적 비교의 맥락 위에 같이 올려놓을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이들을 함께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시와 시인을 통해 광주의 정신가치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무망해 보였다.

“孤獨은 견고하다”고 했던 시인

김현승은 평양에서 태어났으나 목사인 아버지의 교역지를 따라 제주를 거쳐 7세 때인 1919년 광주로 온다. 미션스쿨인 광주 숭일학교 초등과를 1926년 마치고, 다시 평양으로 가 숭실중학을 거쳐 숭실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한다. 1936년 졸업을 목전에 두고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돼 광주로 내려온 그는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 숭일중학교 교감을 지낸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광주호남신문 기자로 잠깐 일하기도 한다.

1948년 숭일중학교 교장으로 승진하나 사퇴한다. 1951년 광주 조선대학교 문리과대학 부교수가 되고 1953년 광주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동인지 「신문학」을 창간한다. 1960년 숭실대학교 부교수가 된다. 조선대학교에서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강사로 3년을 출강한다. 1972년 숭전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취임하나, 1975년 채플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별세한다.

광주는 김현승에게 삶의 고향이자, 시의 고향이다. 무등산에도 시비가 있고, 양림동 정율성로에는 그가 거처했던 집터도 남아 있다. “그는 양림동에서 자랐고, 이곳에서 신접살림을 차려 아이들도 낳고 길렀다. 양림동산에 앉아 무등산을 바라보며 작품 활동을 했다. 「가을의 기도」와 「K도시에 바치는 시」는 이곳 양림동이 그의 고향임을 말해준다.”(광주시 남구청, 『양림을 걷다』).

기독교에 충실했던 그는 신(神)과의 관계에 대해 늘 고뇌했다. 때로는 단절에서 오는 ‘고독’에 침잠하다가, 다시 신에게 귀의하기도 했다. 시인 이운룡은 “김현승은 기독교정신과 고독의식,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시어(詩語)의 건강성 등을 통해 독자적인 내면세계를 이뤘고, 투명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구사했으며, 관념의 세계를 구체적인 사물로, 또는 물체를 관념으로 표현하거나 감각적 이미지로 구상화함으로써 지적이며 상상력이 탁월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했다(『한국현대시인연구 10』, 1993년).

혁명과 통일을 꿈꿨던 戰士 시인

시인 김남주는 김현승이 천착한 ‘고독’의 자리를 자신의 칼과 피로 채운다. ‘평등의 나무를 왕의 군대가, 부자가, 법관이 지켜주랴 천만에!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농부여,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의 칼과 피를 놓는다’고 했다(「나의 칼 나의 피」 1987년).
광주 중외공원에 있는 그의 시비에도 ‘죽창가’로 더 알려진 그의 시, 「노래」가 새겨져 있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꽃이 되자 하네 꽃이/…/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김남주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의 빈농 출신이다. 해남중학교를 거쳐 1964년 명문 광주제일고에 진학하나 이듬해 자퇴한다.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대입검정고시를 치르고 1969년 전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1972년∽73년 유신 반대 지하신문인 『함성』과 『고발』을 만들다가 수감되고, 1974년 학교에서도 제적된다. 이 해 『창작과 비평』지에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발표한다.

1975년 광주에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연다. 1977년 황석영, 최권행 등 광주의 활동가들과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한다. 1978년 상경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 조직원으로 활동 중 체포된다. 1980년 대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8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그가 옥중에서 360여 편의 시를 쓰는 동안 국내외에선 석방운동이 잇따랐다. 199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고 5‧18민주묘지에 묻혔다.

“삶이 부끄러워지면 또 오겠소”

김남주는 혁명시인이다.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해결함으로써 한국사회를 갈아엎고, 조국통일을 하자는 시인이다. 사후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좋아한다. 2000년 5월, 그의 6주기를 맞아 22명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추모 산문집을 냈다. 산문집을 관통하는 매시지는 ‘부끄러움’처럼 느껴졌다. 한 시인은 김남주 무덤 앞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님의 이름이 생각나서/여기 잠시 머물다 갑니다/삶이 부끄러울 때 또/찾아오겠소.’(『내가 만난 김남주』, 황석영 외, 2000년). 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때면 김남주를 찾는가.

문학평론가 염무웅(영남대 명예교수)은 2014년 한 책에서 “혁명시인으로서 김남주의 미덕은 허위와 자기 과시가 없다는 점이다. 그의 메시지에 동조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가 혼신의 정직성과 헌신적 자세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적었다. 염 교수는 물론 김남주의 인식론적 한계도 지적한다. “김남주 시의 각박함은, 사회를 두개의 적대적 범주로 양분하고 현실사회의 갈등과 비극을 적대적 모순의 표현으로만 보는 도식주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김남주의 선명한 계급적 이분법, 불타는 적개심과 격렬한 용어들, 그의 상황판단, 철저한 행동주의에 늘 머뭇거림을 느낀다”며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김남주의 판단에는 냉전시대의 역사적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염무웅, 「역사에 바쳐진 시혼」, 『창작과 비평』, 1993년 봄호).

이념의 문제를 떠나 김남주가 시인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가졌다는 데에 이론은 없다. 문학평론가 유성호(한양대 교수)는 김남주의 서정성(抒情性)에 주목한다. 그는 초기시들 중에서 「노래」(1977년)를 “옥중 체험을 통한 강렬한 저항성과 아름다운 농민적 서정이 하나의 ‘노래’로 눈부시게 통합, 성취된 초기 서정시의 대표작”으로 본다(유성호, 「노래로서의 서정시 그리고 계몽적 열정」, 『시와 시학』 1995년 겨울호). 그는 옥중 시 중 「사랑은」도 서정성이 뛰어난 걸작으로 꼽았다. 우리도 이 시를 좋아한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봄을 기다릴 줄 안다/기다려 다시 사랑은/불모의 땅을 파헤쳐/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천년을 두고 오늘/봄의 언덕에/한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사랑은/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가질 줄 안다/너와 나와 우리가/한 별을 우러러 보며” (「사랑은」 전문).

“관념 지향의 詩에서 최고의 경지”

유성호 교수는 김현승의 시는 “현실 지향의 리얼리즘 미학과 대척점에 있는 ‘관념’의 추구에 그 근간이 놓이지만 그렇다고 현실 도피적 순수시 계열이나 현실 전복적인 언어실험에 탐닉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현실지향’의 시와 ‘관념지향의 시’로 대별되어 나타나는 우리 근현대 시사(詩史)의 자장 안에서 늘 ‘관념’ 쪽으로 경사되던 시인이었고, 그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룬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유성호, 『다형 김현승 시 연구』, 2015년).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은 “오늘날 우리가 김현승의 시를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그 자체로서 우리 현대시의 빛나는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시가 조용한 정신 집중의 소산으로서 거칠어져가는 오늘의 삶에 중요한 반대명제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강인섭 엮음, 『김현승 시 논평집』 2007년).

젊어서는 누구나 김현승의 ‘절대고독’에 빠졌겠지만, 반세기도 훨씬 지난 오늘, 우리는 나이 들어 김남주의 ‘칼과 피’ 앞에 서있다. 그새 세월도 흘렀고 세상도 변했다. 그럼에도,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프라타나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고 노래한 김현승의 감성과 이미지, 그리고 사색(思索)을 먼저 떠올리는 게 편하고 익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허기(虛飢)를 느끼기도 하고.

우리는 시를 잘 모른다. 순수시와 참여시로 나뉜다는 정도밖에는. 시의 그 내밀한 상념과 정치한 형상화, 현란한 언어의 조형술은 우리 능력 밖이다. 그럼에도 누가 “시를 아느냐고 네게 물으면/…광주/김현승과 김남주의/파아란 하늘에 젖어보라”고 권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광주는 시를 느끼게 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 동산에 있는 김현승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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