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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의 파르헤지아] 반도체가 이재용을 부른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1-04-19 04:21
바이든이 반도체인프라를 외치는 시대, '메모리 OPEC국가' 한국이 갈 길은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고 이건희 회장[사진 = 삼성 제공]]




이건희 "생산으로 돈 버는 건 반도체가 마지막"

#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방대한 양의 육성(肉聲) 녹음테이프를 남겼다. 그는 신경영 선언 이후 업무회의 때 발언한 내용을 녹음하도록 했는데, 혹여 나중에라도 자신의 뜻이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함이었다. 이 전 회장은 "내 얘기와 지시, 회의 내용을 수시로 직원들에게 틀어주라"고 당부했다. 그 테이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의료산업은 21세기에 꽃이 필 거야. 생산으로 돈을 버는 건 메모리(반도체)가 마지막일 거야. 미래를 보지 않고는 크게 돈 벌 수 있는 게 없어." 반도체와 의료산업의 흥기(興起)를 예견한 1995년의 발언이다. 당시 그는 반도체 같은 투자 집약적인 대형산업과 인프라를 갖춰놓지 않으면 후대에서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2019년 이재용 부회장은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부친이 메모리 반도체로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면 자신은 비메모리로 두 번째 도약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었다. 삼성이 비메모리 반도체에 투자하기로 한 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이 분야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비메모리는 PC의 중앙처리장치(CPU),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디지털카메라나 스마트폰용 이미지센서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다. 비메모리 시장은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 업체와 이들이 설계한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업체가 경쟁하고 있는 시장이다. 지금 이 부회장은 옥중에 있다.

 

반도체 웨이퍼를 흔드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AP·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바이든 "반도체가 미국의 인프라다"

# '웨이퍼 쇼크'라고 할 만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국제 화상회의에서 바이든이 모니터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준비한 반도체 웨이퍼를 흔들었다. "이것은 미국의 인프라다." 삼성을 비롯해 대만TSMC 등 반도체 파운드리(위탁공급) 기업들에게 보라고 한 행동이었다. "반도체는 미 정부가 짜놓은 2조2500억 달러 규모 일자리 계획의 핵심요소라면서 실행계획 및 재원 조달책까지 보여줬다. 그는 반도체 투자가 미래 안보의 핵심임을 역설하면서, 중국의 첨단 군비증강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동맹' 결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14일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군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까지 "우리는 탈레반이 아니라 중국과의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반도체 관련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부른 일은 미국의 반도체 패권 선언에 대한 대응 차원이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반도체산업에 대한 지원의지를 밝혔다. "글로벌 공급망이 자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면서 "글로벌 공급망을 우리가 계속 주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 대책 마련에 대한 의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의 상황 인식 또한 아직도 원론적인 수준에 그쳐 있었다. "기존 메모리 반도체에 더해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까지 확실한 수출 주력 품목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다"는 말에선 답답한 느낌까지 드는 게 사실이었다. 비메모리 점유율은 10년째 3% 수준이며 메모리(D램, 낸드) 세계 1위 자리도 흔들리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D램 점유율은 작년까지 5년간 5%P 쪼그라 들었다. 거기에 "정부가 절치부심하며 반도체 등 주력 산업 회복에 노력을 기울였고 그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도 초기에 비메모리 반도체를 3대 중점 육성산업 중의 하나로 정하고 범정부 차원의 정책역량을 집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문 대통령은 2019년 연초 기업인 간담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회장을 만나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정부가 이 정책에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사이, 미국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서 '반도체 자강(自强)'을 외치며 삼성의 미국 현지투자를 세계의 시선 앞에서 종용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기업들은 한국이 경쟁국들에 비하여 반도체 산업 지원이 허술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설비투자 지원과 반도체 인력 양성을 오래전부터 건의해왔다. 시설투자 세액공제율(1%)을 선진국 수준인 50%로 높이고,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학과 신설 및 정원 확대를 요구했다. 기업들은 반도체 제조설비 용수를 조달하는 일에 지자체와의 충돌도 겪고 있다. 이런 문제를 풀어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정부는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해 왔다. 상황이 이런데 무슨 노력을 기울였고 그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인지 알기 어렵다. "기업과 정부가 한 몸"이라 한 대통령의 수사(修辭)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세계 반도체 투자 경쟁 불붙었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총 500억 달러(약 56조원대)의 지원계획을 발표했고 2024년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투자에 대해 최대 40%까지 세금을 공제해주기로 했다. 독일도 36억 유로(약 5조원대)를 투자해 반도체를 자립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지금의 두 배인 20%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로 설비투자액의 40%를 지원하기로 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기 위해 투자를 대폭 늘리고 감세정책을 펴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대만도 발빠르게 움직인다.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올해 설비투자계획을 석달 전인 1월에 발표한 투자액 280억 달러(약 31조원)보다 더 높인 300억 달러(약 33조원)로 결정했다. 이 기업은 향후 3년간 1000억 달러(약 112조원)를 투자하겠다는 별도 계획을 밝힌 바 있다. 2030년까지 133조원을 시스템 반도체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삼성과 비교하면 그 투자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성과의 격차를 더 벌리겠다는 TSMC의 의욕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금 우리 정부와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제 상황의 정확한 인식이 필요할 때다.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이후 우리 경제성장을 주도해온 근간이었다. 현재 수출의 20%, 상장사 영업이익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핵심산업이다. 반도체 패권전쟁은 백신수급 대란과 부동산 실정과 함께, 문 대통령이 현재 당면한 3대 중대사태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이 글로벌한 산업패권 문제가 향후 국가 명운을 좌우할 가장 큰 이슈일 수 있다. 반도체 문제를, 최근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포인트로 나눠 정리해보자.

이 전쟁은 왜 생겨났는가
매우 빠른 속도로, 반도체 수급 불균형이 발생했다. 즉 반도체가 갑자기 더 많이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먼저 코로나19가 그 이유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4차 산업혁명을 더욱 자극했고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증강현실, 가상현실 분야에서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코로나의 근본 원인이기도 한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전기차 시장을 키웠기 때문이다. 탄소중립정책이 확산되면서 차량용 반도체 수요가 급증한다. 결국은 코로나가 반도체의 수요 폭증을 만들어낸 셈이다. 반도체 물량이 달리면서, 이것이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것임을 각국은 절감한다. 자동차, PC, 스마트폰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 제조업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반도체가 21세기의 석유와 같은 존재이며, 파운드리 업계 2강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를 '신(新) 반도체 OPEC'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패권 전쟁을 들여다보면,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가 그 실체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이 사태에서 주력해야 할 것은, 국내 제조업을 보호하는 문제와, 국내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고 관련 산업의 집중 지원을 통해 미·중의 갈등에서 자기 산업 보호를 해내는 일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30일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부품연구동(DSR)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반도체 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이 웨이퍼는 세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통해 양산된 제품이다. 2019.04.30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시장 주력인 D램에서는 70%,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4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밝힌 전략처럼, 앞으로는 메모리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탈피해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분야를 육성하고 시스템 반도체 수요에 총력으로 대비해나가야 한다. 글로벌 상황은 어떤가. 우리가 미·중 사이에 낀 샌드위치인 건 맞지만, 한국이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 갈등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 즉 막강한 시장을 바탕으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으려는 중국의 추격을 미국이 견제해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제는 한국에게 좀 더 격차를 벌릴 시간을 벌어준다. 향후 4~5년간 미국이 안보 측면에서 중국을 누르고 있을 때의 시기를 잘 활용하는 것이 한국에게는 몹시 중요하게 됐다.

한편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외치고 있긴 하지만, 사실 현재까지 미·중의 반도체 경쟁력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기술력과 장비, 시장 주도권에서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이 중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건, 그 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작년 한국 반도체 수출 중에서 중국이 사간 것이 39.6%였다. 특히 화웨이(반도체 장비업체)는 5년 새 국내기업(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40조원대의 반도체를 구매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출대상이다.

반도체 기술도 고도화의 벽이 있다.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선점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시간이 흐르면, 한국도 기술의 벽에 막히고 후발 강력주자인 중국에 따라잡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시간의 문제이기에, 우리가 얼마나 리드하는 기간을 가지느냐가 이 산업에서 확고한 위치를 굳힐 수 있을지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국을 자극해 시장을 잃는 선택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우리의 반도체를 사주는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그 반도체 기술을 쥐고 있는 미국을 양손으로 조율하여 가장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에게 공히 한국이 필요하기에, 일정하게 관계를 주도할 수 있는 전략적 외교가 특히 필요하다.

우리 기업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올 반도체 산업의 전체 성장률은 12% 정도로 예측하고 있고, 파운드리 산업도 16% 성장이 예고된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은 곧 어느 정도 해소되겠지만 완전히 해결되려면 2023년은 돼야 한다는 전망도 있다. 반도체 수요의 폭발적 증가세는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 사업 확장에 명운을 걸어야 할 때다. 삼성전자의 미국 현지투자 확장은, 미적거릴 '필요'도 '여유'도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기업들은 현재도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삼성전자는 최근 시스템반도체 설계 사업부가 이미지센서 생산을 대만업체 UMC에 맡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사 파운드리를 이용하지 않고 다른 나라 기업에 맡기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스마트폰용 상보형 금속산화반도체(CMOS)라는 이미지 센서의 생산을 맡긴 것인데, 반도체 공급이 부족한 가운데 외부와의 협력으로 윈윈을 꾀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외부 파운드리를 활용한 선택과 집중은, 1위 업체인 대만 TSMC에 대한 공세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 같은 합종연횡은, 반도체 시장의 생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치열한 각자도생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문 대통령이 강력 지원을 천명했지만, 기업이 원하는 지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까봐 오히려 걱정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가 전면에 나설 경우, 오히려 여러 겹의 압박만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이 원하는 것은, 세제 혜택 · 공장 건설 절차의 간소화 ·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과 같은 지원이다. 거기에, 미국이 반도체발전법을 발의한 것과 같이 한국도 '반도체 육성 특별법' 같은 것이 제정될 필요가 있다. 또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은 적극 참여하는 게 유리하다. 우리 반도체 산업의 핵심장비는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에서 수입한다. 특히 비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미래차와 같은 전략종목에서 기술개발의 유리한 지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4년 내내 기업 규제를 강화하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문재인 정부의 분위기가 대체로 기업 경영행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정책에도 이유와 근거가 없지 않지만, 그것이 미래를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전향적으로 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기조를 수정하지 않고, 기업들이 알아서 반도체 전쟁을 치러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정부로서 적합한 처신이 아니다. 얼마전 다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부재 상황도, 절체절명의 난국을 헤쳐나갈 킹핀을 뽑아놓은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최근, 정부에 그의 사면을 호소하고 있기도 하다. 코로나가 반도체 전쟁을 불렀고, 반도체가 다시 이재용을 부른다. 웨이퍼를 든 바이든이 간절한 눈빛으로 삼성을 부르고 있었던 것처럼.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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