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어젠다]<5> 발→​손→​가슴→'머리' 쓰는 선도국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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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 수석논설위원
입력 2020-08-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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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선도국가로 뛰어오르자 ​- 건국·산업·민주화 끝에 '4차혁명 찬스' 잡아라

 
 
 
 
 

포스코가 10일 광양제철소 3고로 현장에서 그룹사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2차 개수를 마치고 3대기 조업을 시작하는 고로 화입(용광로에 불을 붙이는 작업)식을 진행했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점화봉에 불을 붙여 3고로 풍구에 화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12월 13일 '세계의 철강인' 박태준 전 총리의 서거는 산업국가 대한민국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 포스코를 일군 박태준이 ‘철강보국(鐵鋼報國)’이라는 국가 발전 어젠다가 그의 서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출근했던 광화문 파이낸스빌딩 1101호 집무실 벽에는 중국지도가 걸려 있었다. 그냥 중국 전도(全圖)가 아니라 그 위에 빼곡히 빨강, 노랑 스티커를 붙인 박태준의 중국지도다. 중국 전토에 있는 주요 철강공장들을 낱낱이 파악한 그의 전략지도다. 그는 세상을 뜨기 몇달 전 집무실에서 만난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철강산업을 통해 중국을 유심히 봐왔는데, 이제부턴 자네들이 중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나가는지 잘 살펴보게.”

박태준이 일군 글로벌 기업 포스코에 최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020년 2분기 중 포스코가 계열사 실적을 반영하지 않은 별도 기준으로 사상 첫 영업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간 중 매출은 작년 동기 대비 21.3% 감소한 5조8848억원, 영업손실은 1085억원으로 적자전환을 기록했다. 포스코는 이 같은 영업 적자가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시작한 세계적인 철강 불경기 탓이라고 설명하면서 3분기부터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사상 첫 영업적자의 쇼크는 크다. 한국경제의 최고 우등생인 ‘철옹성 포스코’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39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포스코그룹이 연결기준으로 매출 13조7216억원, 영업이익 1677억원의 영업실적을 기록했다는 것은 포스코 ‘철강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알려주는 통지표라고 볼 수 있다. 포스코가 세계 경기에 좌우되는 과거의 ‘철강의 시대’를 넘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신철강의 시대’를 열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국면에 놓여 있다. 철강은 소재산업의 핵심이며, 조선·자동차·석유화학·시멘트 등과 함께 한국의 중후장대 산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경제의 30%를 차지하는 제조업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포스코의 변신은 한국 제조업의 변신이며,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의 살 길이다.

이병철의 삼성그룹, 정주영의 현대그룹 등 재벌그룹이 이끌어온 기업보국(企業報國)의 반세기 역사도 2세, 3세로 이어지면서 기업의 이념과 가치는 물론 돈 버는 업종도 크게 바뀌었다. 수많은 IT(정보기술) 기업들이 급성장한 최근 10년에 걸친 한국의 산업사는 그야말로 획기적이다. 이제 ‘기업보국’이 ‘창업보국(創業報國)'으로 바뀌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새로운 변신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예컨대 서울 강남의 테헤란밸리, 양재동 연구개발파크, 성수동 테크노단지, 마포 창업타운, 홍대·합정의 K-컬처 스트리트, 구로·가산 디지털단지, 마곡 테크노밸리, 상암 미디어밸리, 고덕 엔지니어링파크, 홍릉 강소연구개발특구 등이 출현하면서 서울은 소비문화 도시에서 과학기술산업 도시로 변했다.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는 또 다른 대한민국 자산이다. 새 지평이 열리고 있는 서울과 판교는 창업보국의 현주소다. 이들은 정책의 거대한 부화장치(인큐베이터)다. 여기엔 압도적인 열량으로 미래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IoT(사물인터넷)와 AI(인공지능), 바이오 등으로 대변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은 이제 추세를 넘어 국가경영과 기업경영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술 우위를 노린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이 이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라는 검은 백조(black swan)가 나타나 세계를 공전(空前)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각국 정부는 금융시장 혼란을 막기 위해 재정금융 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산되면서 등장한 세계의 공통어는 ‘쿼바디스(어디로 가는가)’다.

‘포스트 코로나, 한국의 쿼바디스’. 많은 한국인들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60대 이상의 시니어들은 “후진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으로 간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했는데, 선진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후진국에서 살아갈까봐 심히 걱정된다”고 말한다.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지식인 이반 크라스테프(불가리아 소피아대학 리버럴전략센터 이사장) 는 “내가 미래를 비관하는 것은 팬데믹 그 자체보다도 협력해 위기에 대응할 수 없는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며, 결국 인류의 희망을 과학과 이성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이 지난 6월 말까지 집계해 분석한 ‘각국의 코로나 대응 평가’에 따르면 상위 10위에 오른 나라는 대만, 말레이시아, 홍콩, 태국, 중국, 한국, 호주, 뉴질랜드, 일본, 노르웨이 순이었다. 미국, 멕시코, 브라질은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이 평가는 코로나 피해(감염자수, 감염확대율, 치사율)와 경제 피해(GDP 손실)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이 평가에서 상위에 오른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은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반한 국가 지도자의 신속한 정책결정과 조치였다. 요즘 각국에서 AI와 데이터과학 등을 동원해 과학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정책입안을 중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경제정책 입안가들은 이른바 ‘증거기반 정책형성(EBPM)’의 경제학에 주목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새로운 과학기술 시대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NISTEP)가 최근 일본 내 2000명의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과학기술'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코로나19 사태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연구 활동 양태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발명, 이노베이션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응답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과학기술정책의 방향성에 대해선 ‘국가위기 극복과 사회경제 회복에의 공헌’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은 ‘기초과학 연구의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착실한 추진’, ‘공통기반의 충실화와 산학연 협력의 추진’ 순으로 나타났다. 폭넓은 분야에서의 연구자·기술자 육성과 확보, 연구개발 사업의 확충과 다양화도 지적됐다.

미래학자 최진석 서강대 교수는 민주화사회 다음으로 ‘선도국가 한국’을 제창하고 있다. 한국은 건국시대·산업사회·민주화사회를 거치며 생각하는 힘을 다 잃어 장래가 없어 보이지만, 마침 제4차 산업혁명으로 문명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고 있는 데다 한국경제가 최고의 상승기조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최 교수는 분석한다.

우리는 이제 ‘선도국가 한국’을 지향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는 ‘선도국가 한국’을 위해 이미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2040년을 겨냥한 장기 국가발전계획인 4차 과학기술기본계획(2018~2022)이 좋은 사례다. 과학기술부의 김성수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이번 정부는 과기예산 20조원 시대를 열고, 30조원 시대를 준비하는 정부”라고 규정하면서 “경기가 나쁠수록 연구개발 예산을 늘리는 정부의 의지에 기업들도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과기예산은 24조원을 넘어섰으며, 내년에는 27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산주도형, 투입주도형 정책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약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먼저 정부의 중장기 계획이 남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미래연구원에 따르면 정부의 중장기 계획은 모두 530개에 이른다. 부처별로 수십개의 계획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정부도 이런 계획들을 종합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규제 장벽이 되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중장기 계획의 남발은 정책의 효과와 효율을 떨어뜨리고 관료주의를 천착시키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과학기술정책과 맞물려 있는 산업정책도 손댈 곳이 많다. 일례로 국내 산업단지는 국가산업단지 47개를 비롯, 모두 1220개에 달한다. 총면적 14억2800만㎡에 10만4000개 업체가 입주해 220만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산단을 놓고 산단고도화, 스마트산단, 에너지융합산단, 특화단지, 규제특구 등 새 정책이 나올 때마다 덮어씌워 각 산단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말았다. 여기에 과기부의 연구개발특구, 강소특구들을 합치고, 테크노파크(TP)와 창조기술혁신센터까지 포함하면 사정은 더욱 심각해진다.

생산기술연구원의 박문수 연구위원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산업정책을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다. ‘새로운 산업정책’은 ‘새로운 산업’ 정책과 ‘새로운’ 산업정책으로 정리해 전자는 신산업 창출에, 후자는 기존산업 재생으로 정책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박 위원은 지적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노동 4.0’(제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새롭게 일하는 방식)의 정착도 중대한 국가적 과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메이드 인 코리아’ 경쟁력강화 전략은 국내 대표적인 석학들이 펴낸 ‘코로나 사피엔스’(2020년 최재천 등)에서도 제시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현재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들이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대만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대만은 정책과 현장 전문가들에 의한 적확한 예측과 책임 있는 제언,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정책을 투명한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추진해 나가고 있다. 많은 정책들이 ‘불완전 연소’로 사라지는 우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

코로나19 사태는 역사의 변곡점이다. 모든 나라가 가진 실력을 총동원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한 가지 정책이라도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세계 주요기업의 약 40%가 올 1, 2분기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의 살 길이 ‘메이드 인 코리아’의 경쟁력에 달려 있음을 재삼 인식해야 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새로운 변신으로 이제 ‘선도국가 한국’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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