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民유착 ..시민운동 일그러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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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0-06-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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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미향 사태’가 주는 교훈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시민사회단체에만 적용될 헌법이 있다면 제1조는 무엇일까. ‘정치로부터의 독립’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정치에 휩쓸리지 않아야 할 의무 말이다. 정치적 독립성이 결여된 시민단체는 권력에 대한 감시라는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해내기 어렵다. 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의 입맛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단체를 시민단체라고 하기 어렵다.

헌법 2조가 있다면 그것은 ‘책임의 원칙’이다. 사회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으면 성과가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시간만 질질 끌면서 자신들은 갈등의 과실이나 따먹는 것처럼 비친다면 곤란하다. 그런 단체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거나, 더 정직하고 유능한 다른 단체로 교체되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타적 사명감과 희생정신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을 생계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고인물이 썩듯이 운영을 둘러싼 부정과 비리 의혹 속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윤미향 의원이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국민 후원금 사용에 관한 의혹들에 관해 설명했다. 본인은 ‘소명’이라고 했지만 소명이라고 느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기된 의혹들에 대한 해명이 너무 부실했기 때문이다. 윤 의원은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있어서 세세한 내용을 모두 말씀드릴 수 없다”고 했다. ‘검찰 조사에서 다 밝히겠다’는 말로 들렸지만 그렇다고 밝혀질까. 윤 의원은 후원금을 자신의 개인 계좌로 받았다고 했다. 이 말은 동일한 계좌에 후원금과 자신의 사적인 돈이 뒤섞여서 입금되고, 출금됐다는 얘기다. 횡령, 또는 유용 혐의를 입증하려면 우선 이 돈들을 구별해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출금된 용도와 용처를 일일이 따져서, 이건 개인용도, 이건 공적인 용도로 식으로 분리해야 한다. 공적인 용도로 썼다고 해도 정말 그렇게 썼는지, 해당 기관이나 사람들을 전부 불러서 확인해야 한다.(그 수가 수십명에 이를 수 있다.)

조국사태’를 떠올리게 한 윤미향 의원

검찰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보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신상 털기’ 시비가 안 일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 검찰의 과잉수사, 인권침해 논란은 물론이고. 그래서일까.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소명 기자회견 이틀 전인 27일 “신상 털기 식 의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신상 털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우연일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국 사태’ 때 질리도록 보았던 광경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지켜보고 있어서 그렇게 안 될 거라고?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비영리민간단체)는 2019년 3월 기준 1만4404개에 달한다. 통합당이 이 막강한 시민사회단체들과 평생 척지고 살 생각이 아니라면 섣불리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회계의 투명성 문제가 어디 윤미향 의원만의 문제인가. 통합당은 보혁(保革) 구분 않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힐 용기가 있는가.

위안부 운동은 이미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미 일본 산케이신문이 “위안부 운동의 적폐가 드러났다. 수요 집회의 중단은 물론 소녀상도 즉각 철거해야 한다”는 요지의 칼럼을 실었다. 아베 총리의 측근인 니시오카 쓰토무 레이타쿠대학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위안부 연행이 날조임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매일경제 5월30일). 윤 의원은 결국 자신이 30년 몸담았던 시민단체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혔다. 시민단체와 정치권력 간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유지됐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시민사회운동가, 그것도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위안부 운동가를 정치에 끌어들일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정치와는 거리를 둔 독립된 존재로 그냥 놔두는 편이 윤 의원 개인에게나, 이 정권에나 더 나았을 것이다.

‘진보정권’일수록 시민단체와 거리 둬야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그 뿌리를 1980년대 민주화 투쟁에 두고 있어서 태생적으로 진보 친화적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1990년대의 평등, 평화, 환경, 젠더, 반(反)세계화, 반(反)자본 등을 주제로 한 신(新)사회운동이 가세함으로써 세력은 더 다양하고 강해졌다. 그런 진보를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김근태(전 통합민주당 의원 · 2011년 타계) 같은 시민사회운동가들의 이른바 ‘비판적 지지’와 맞바꿔 수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이런 역사도 있고 해서 시민단체는 진보정권의 중요한 지지기반의 하나다.

그렇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거리를 둬야 한다. 시민단체가 정부 고위직으로 가는 ‘블루오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 정권 들어 참여연대 출신들이 청와대와 행정부에 대거 진입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참여연대와 공동정부” “만사참통”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물론 다수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치와는 선을 긋고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한 구성요소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다. 이들 덕에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원주의(pluralism)와 공론의 장(場)이 유지되고, 대의제(代議制)의 취약점이 보완된다. 권력과 더불어 이미 ‘기관’이 되어버린 유력 시민단체들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권력과 유착된 시민사회단체에 남는 것은 진영뿐이다. 권력 감시는커녕 오직 내 편과 네 편, 편 가르기에만 전념할 뿐이다. 전 정권의 댓글 조작사건에 대해서는 경찰관 15명을 고발했던 참여연대가 민주당 인사의 ‘드루킹 스캔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은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희롱, 성추행 사건이 그렇게 터져도 가해자가 우리 편이면 성명 하나 제때 내지 않는다. 심지어는 윤 의원 사건처럼 부실 회계, 기부금 유용·횡령 등 단순명료한 사건을 “극우 보수, 친일 토착왜구의 역습‘으로 왜곡, 포장하기도 한다. 급기야는 위안부 할머니를 향해 막말을 하는 패륜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라도 시민사회단체와 정권,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아울러 시민사회단체의 고질병인 불투명 회계 논란을 개선하기 위해 제도적 정비에 나서야 한다. 한때 거론됐지만 법무부의 반대로 무산된 비영리 공익법인에 대한 외부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자선법(Charity Act)처럼 기금을 모으는 주체와 쓰는 주체를 구분해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방안도 고려해봄직 하다. 우리도 사회복지공동모금 제도가 있긴 하지만 차제에 개선, 보완할 점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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