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답게’를 ‘주류답게’로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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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0-05-2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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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대국민 특별연설(10일)에서 “‘이미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떠오른 단어는 ‘엽전’이었다. 엽전은 한국인이 스스로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지금 장년층만 해도 “엽전 주제에···”, “엽전이 별 수 있어···” 같은 말을 듣고 자랐다. 왜 하필 엽전일까. 근세 개화기에 엽전의 가치가 당백전, 당오전, 백동전 등의 형태로 빈번히 왜곡돼 끝내 한낱 ‘값싼 쇳조각’으로 전락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이용선의 ‘돈 이야기’). 국운이 쇠락하고 세상이 바뀌면서 백성도 천덕꾸러기 엽전 신세가 된 셈이다.

그 엽전들이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면서 엽전이란 말도 자취를 감추었다. 당당히 중진국 반열에 오름으로써 자기혐오의 그 자리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은 결과였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나아가 ‘선진국’이라니, 스스로도 대견했다. 자긍심을 자극한 것은 물론 코로나에 대한 우리의 대처능력이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방역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 세계의 표준이 됐다”면서 “우리가 따르고 싶었던 나라들이 이제 우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긍심이 지나치면 시쳇말로 ‘국뽕(국수적 민족주의자)'이 된다지만 그렇다고 자학적인 ‘엽전’에 비할까.

그동안 선진국 콤플렉스가 우리를 얼마나 옥죄었나. ‘발전국가’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것도 선진국이 되고픈 갈망 때문이었다. 그 문턱을 거뜬히 넘어섰다고 대통령은 언명한 것이다. 솔직히 선진국 입성의 샴페인을 진보 좌파정권 하에서 터뜨리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국가발전의 경로에 대한 보수 우파의 아픈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코로나 대처에 도움 준 메르스 경험

코로나 방역의 성공에는 2015년 5월 발생한 메르스(MERS) 사태 때의 경험과 대처 노력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방역, 치료, 의료체계의 기틀이 그때 잡혔다. 모든 환자들은 병원에 들어오기 전에 체온을 측정토록 했고, 응급실 공간을 나눠 메르스 의심자와 일반 환자가 따로 쓰게 했다. 음압병상 설치를 의무화하고, 의료진은 방호복을 입도록 했다. 생활방역의 3대 요체로 자리 잡아 각국의 모범이 된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도 그때 시작됐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의료진이 가세했다. 메르스는 7개월 만에 종식됐는데, 총 확진환자는 186명, 사망자는 38명이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문 대통령도 한마디 언급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적폐 정권’이라고 해도 긍정 평가할 부분은 평가해주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탄핵은 탄핵이고 메르스는 메르스다. “전 정권에서 메르스를 겪으면서 코로나 같은 감염병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었고,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다”고 덕담이라도 했더라면 분위기는 더 고무됐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5년 6월 22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서 노무현 정권의 사스(SARS) 대처를 극찬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과거 사스 위기를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철통 방어했고, WHO로부터 ‘모범 방역국’으로 평가받았던 나라입니다.”

흔히 선진국의 조건으로 소득, 법치, 정치적 안정, 신뢰와 연대(사회적 자본) 등을 꼽는다. 여기에 하나를 보탠다면 상대방을 인정함으로써 정책의 영속성을 유지해 나가는 능력일 것이다. 성숙한 정치 또는 협치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진보세력은 국가적·국민적 성취의 의의를 곧잘 반 토막 낸다. 빌 게이츠도 칭찬해 마지않은 K-방역으로 선진국 입성의 출입증을 땄다면, 그건 정권을 떠나 대한민국의 성공이어야 맞는다. 그걸 한 세력의 성공으로 국한시킨다면 협량(狹量)일뿐더러 전략적으로도 현책이 못 된다. 비근한 예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노벨평화상 수상이다. 나는 지금도 아쉽게 생각한다. DJ가 “이 상은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YS) 등 역대 정권의 간단없는 대북 화해‧협력 노력 덕에 받는 것”이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더라면 수상의 의미는 더 컸을 것이다.

국가적 성취를 진영 안에 가둬서야

박정희의 7‧4 공동성명, 노태우의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 김영삼의 국내정치에서의 탈(脫)보수화 노력(하나회 해체) 같은 레일이 깔려 있었기에 DJ의 햇볕열차가 달릴 수 있었다. YS의 기여가 특히 컸다. 북핵을 북·미 제네바기본합의(1994년 10월)라는 틀 속에 붙잡아 둠으로써 DJ는 재임 중 북핵 고민 없이 대북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DJ의 업적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모든 성취를 ‘햇볕정책’이란 자신의 브랜드 속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의의를 반감시킨 게 아쉽다는 얘기다. 가두지 않고 풀어버렸다면, 햇볕정책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열도 훨씬 덜했을 것이다(졸저 ‘사회통합형대북정책’ 2013년).

코로나 방역도 마찬가지다. 사스와 메르스의 경험을 잇는 기반 위에서만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역이 가능하다. 문재인 정권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창의적 의료기법들, 예컨대 드라이브 스루 진단(승차 진단)이나 경증환자를 위한 생활치료센터 운영 등도 다음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더 나은 방식으로 진화될 것이고 또 되어야 한다. 그런 순리 앞에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정책이든 국가든 지속가능성이 담보될 때 발전한다. 지속가능성에 기초한 예측가능성 위에 우리의 삶을 설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보수 정권과의 단절을 통해 진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은 선거 전략으로는 유용할지 모르나 바람직한 국정운영의 방향은 아니다. 절반에 가까운 국민을 포용의 대상이 아닌 배제의 대상으로 삼고서야 어떻게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기를 바랄까.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4‧15 총선에서 압승함으로써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사회의 주류(主流)임을 인정받지 않았는가. 국민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여야 정치인들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을 보고 세상이 바뀌었음을 절감했다.

‘주류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때가 됐다. 국회 과반의석에 임기 4년차임에도 대통령 지지율이 60%대를 유지하고, 20년, 50년 집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주류가 아니면 누가 주류인가. 청와대건 당이건 ‘나라답게’를 ‘주류답게’로 바꿔야 할 때다. 국민의 80% 이상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2019년 12월 갤럽). 집권세력과 국민 사이에 모처럼 조성된 상응(相應) 모드다. 선진국이란 그런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일 게다. 다시 ‘엽전’이 되고 싶은 국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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