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보다 임장"...우울한 부동산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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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연 기자
입력 2020-02-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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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졸 후 꿈보다 청약...결혼 앞두고 외벌이 선택한 20대

  • 평생 노력하며 살았는데 한순간에 루저...뒤늦게 부동산 공부 시작한 30대

[아주경제]


# 올해 5월 결혼을 앞둔 김은지(28)씨는 신혼부부 특별공급 청약을 받기 위해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남편의 소득과 합치면 월소득이 750만원이라 신혼특공 기준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어느 지역에서나 아파트 청약에 성공하면 최소 4억 이상 벌 수 있다”면서 “10년간 직장 다녀서 모을 수 있는 돈보다 많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회사를 다닐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30대 직장인 문성모씨는 요즘 업무에 집중도 안되고 자주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빠진다. 최근 친구가 부동산 투자에 성공해 2년만에 3억원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씨는 “대학때도 더 열심히 공부했고, 직장도 원하던 곳에 취업했는데 한 순간에 루저(loser)가 된 느낌”이라며 “더 뒤처지기 전에 부동산 투자를 시작하기 위해 스터디에 가입했는데 마치 ‘24시간 투자 대기조’가 된 것 같아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했다.

중국에 ‘3-3-스’ 법칙이 있다면 한국에는 ‘3-3-부’의 공식이 있다. 30대 청년 3명이 모이면 중국에선 스타트업과 혁신을 말하지만 한국에선 부동산 얘기만 한다는 청년들의 자조섞인 한숨이다. 누가 어디에 산 아파트가 얼마나 올랐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인 ‘부동산 공화국’의 서글픈 현실이다.

1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부동산 투자 정보는 이미 일상 곳곳을 잠식하고 있다. 실제 유튜브에 ‘부동산 투자’ 정보를 검색했더니 순식간에 수천 개의 관련 동영상이 검색됐다. ‘마용성 실전투자’, ‘2020 유망지역’, ‘5000만원으로 1억 벌기’, ‘용인·수원 경기도 난리났다’ 등 투자를 부추기는 정보부터 ‘부동산 대폭락’, ‘여러분 당장 집 파세요’, ‘위례에서 부동산으로 5억 날리기’ 등 투자를 경고하는 콘텐츠까지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언제 어디서든 부동산 투자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과 수억원을 한꺼번에 벌 수 있다는 ‘한탕주의’가 부동산 광풍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30대가 이러한 열풍을 주고하고 있다는 의미는 적지 않다.

한 분양시장 관계자는 “요즘은 경매나 오피스텔 분양에 관심을 갖는 대학생, 젊은 직장인들이 많다”면서 “아파트로 돈을 번 부모의 학습효과와 청약시장에서 소외됐다는 박탈감이 맞물려 ‘내집 마련’에 대한 강박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포털 커뮤니티, 텔레그램 등 SNS 등에서는 아파트 청약과 재건축·재개발, 토지 등 부동산 투자 정보를 24시간 초 단뒤로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보 소비자들은 주로 30~40대 직장인이다. 막상 공부를 위해 가입했다가 실시간 울려대는 핸드폰에 업무생산성이 떨어지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된 투자를 했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IT기업에 근무하는 40대 직장인 남모씨는 “관심지역별로 부동산 카페에 가입해 올라오는 투자정보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하고 있다”면서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2~3명씩 짝을 지어 주말마다 임장을 다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 7일 일하는 느낌이라 피곤하지만 그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 믿는다”며 “성투(성공적인 투자)할 때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직장인 박모씨는 최근 친구가 산 집이 두 배나 올랐다는 소식에 뒤늦게 부동산 투자족에 합류했다. 그는 “주말마다 가던 독서모임과 운동모임을 없애고 3040 부동산 공부모임에 가입했다”면서 “최근 오피스텔과 상가에 관심이 생겨 멤버들과 주말마다 매물을 보러 다닌다”고 했다.

설사 투자에 성공하더라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투자성과와 기대수익에 아쉬워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용산과 잠원을 거쳐 최근 개포 프레지던스자이 입성에 성공한 50대 여성 진모씨는 “남편 반대를 무릅쓰고 산 집값이 오히려 떨어졌을 때, 눈앞에서 놓친 아파트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가 됐을 때, 내가 알려준 정보로 투자를 한 옆집이 큰 돈을 버는 걸 봤을 때 등 지난 20년간 부동산으로 맺힌 응어리가 소설 한 권”이라며 “이번 청약 당첨으로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년만에 처음으로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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