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언의 베트남 인(人)]베트남 남부의 패왕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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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
입력 2020-02-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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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년 베트남전 참전용사 출신…베트남 '제2고향'처럼 여겨

  • 태광비나, 베트남 1호 진출 기업...베트남 봉제산업 붐 이끌어

  • 응우옌 떤 중 서기장 등 베트남 고위층과 두터운 관계로 유명세

  • ‘박연차게이트’로 구설수 오르며 노무현 대통령 버렸다는 멍에도

고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사진=태광실업 제공]


'베트남 남부의 패왕', '신발산업의 거목', '노무현의 사람'

파란만장했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삶을 따라다닌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고(故) 박연차 회장이 지난 달 31일 서울 일원동에 위치한 삼성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태광실업은 “박 회장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며 “장례는 평소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최대한 간소하고 조용하게 치를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 회장은 1945년 11월 경상남도 밀양시 산골짜기에서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주변 지인들에 따르면 박 회장은 중학교 입학을 포기할 만큼 어려운 성장기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20대에 들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66년 베트남전 파병군으로 자원입대해 1968년까지 44개월간 복무한 경험 때문이다.

당시 박 회장은 베트남 남부 캄란보급대에 근무하며 사업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발견했다. 이때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의 막내 동생 박연희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 회장이 매번 베트남 사람들이 신발을 신지 않아 상한 발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신발을 신으면 참 예뻐질 텐데’라며 관련사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했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박 회장은 1971년, 26세에 정일산업을 창업해 신발사업에 도전한다. 이후 그는 1980년 태광실업으로 법인명을 전환하고 50년간 회사를 매출 3조8000억원, 임직원 10만여명, 22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태광그룹으로 성장시킨다.

박 회장은 세계 신발산업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꼽힌다. 이는 평소 돈을 좇기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그의 사업 철학을 기반으로 신화창조를 이뤄냈다는 평가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고비는 많았다. 1990년대 마약투약 혐의에 이어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이른바 ‘박연차게이트’에 휘말렸던 것.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지만 그는 검찰의 진술과정에서 오랜 지기를 배반했다는 일각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결국 그는 291억원의 벌금과 실형 2년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2014년 풀려났다.

◆박연차와 베트남, 반세기 넘는 인연 시작...'태광비나' 현지 굴지기업으로 성장

박 회장의 인생에서 단연 빠질 수 없는 키워드는 바로 베트남이다. 인생의 여러 부침 속에도 그에게 절대적인 부(富)를 안겨준 것은 베트남이었다. 베트남 신발업계 진출 1호기업이자 베트남 남부 신발·봉제산업의 개척자로 국내사정은 여의치 않았지만 베트남에서만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호찌민 상공회의소의 한 봉제기업 대표는 “박연차 회장의 태광비나 성공이후 90년대 말부터 베트남 남부에 한국 봉제기업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은 베트남에 1994년 진출했다. 당시 북방외교가 수립되고 모두가 중국과 동구권을 바라볼 때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베트남 또한 개혁노선인 도이머이를 선포한 지 10년이 채 안된 시기였다.

“베트남 진출을 논의할 때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원들이 중국이나 동유럽 등을 권유했을 때도 회장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참전 당시에 생긴 베트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뿌리치지 못하신 겁니다.”

박연희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그는 베트남에 진출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 사업이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베트남 정부의 각종 인허가, 노무관리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쉽지 않았던 것. 이에 베트남 정부와 갈등을 풀기위해 박연차 회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각종 인허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관리를 만나 선물이나 금품이 통하지 않자 부부를 식사 초대했다. 실수를 가장해 음식물을 정부 관리의 부인 옷에 묻게 했다. 그런 뒤 그에게 새 옷을 사주고 사업허가를 받아냈다.

결국 그는 업계를 놀라게하면서 베트남 진출 수년 만에 태광비나를 흑자 기업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태광실업의 베트남법인인 태광비나는 첨단시설을 도입하고 나이키 제품 중 고급물량만을 주로 처리하며 신발산업의 주요 기업으로 거듭났다.

현재 태광비나는 직원만 7만명에 달하며 세계적 상표인 나이키 전체 물량(2억5000만 켤레)의 약 7%인 연간 1700만 켤레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태광그룹 전체에서도 70%에 해당하는 매출액이다.

◆한국인 최초 노동훈장...베트남 정부와 유대감 이어가며 '민간외교관' 역활도

 

2017년 10월 태광비나를 방문한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왼쪽)가 박연차 회장과 만나고 있다.[사진=태광실업 제공]


'베트남 서기장을 독대해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한국기업 대표'

호찌민의 교민들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특히 박 회장의 베트남에서의 폭넓은 인맥은 현지에서 더욱 유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듯 2008년 쯔엉 떤 상 국가주석과 2017년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취임 후 연이어 태광비나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국가최고지도자급이 지방정부의 공장을 방문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날 푹 총리는 공장에 조성된 태광 유치원, 사내 병원, 직원 전용마트 등 임직원 복지시설을 둘러본 뒤 “태광비나는 5만 명 이상의 고용 창출은 물론 훌륭한 노사관계를 가꿔오는 등 베트남 투자 기업 중 가장 모범적인 기업”이라며 “앞으로 베트남의 국민 기업으로 성장해 달라”고 당부했다.

여기에 베트남 농 득 만 공산당서기장, 쩐 득 르엉 국가주석 등 고위 인사의 한국 방문 시 박회장의 태광비나가 공식적인 지원만 40여 차례가 넘는다. 또한 태광비나는 한국의 선진행정을 배우려는 베트남 공무원의 한국연수, 베트남을 소개하는 책자발간, 베트남 투자 한국어판 발간을 비롯해 물심양면 정부 지원사업을 벌여왔다.

하지만 그는 베트남 고위층과 친분을 온전히 태광비나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현지에서 회장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호찌민 초기 교민사회 당시 한인회가 만들어지고 호찌민 한인상공회의소가 생기는데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한 봉제기업 대표는 “90년대 말부터 봉제기업들이 호찌민을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태광비나가 이를 안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며 “선두 기업으로서 한국기업을 위한 이익을 대변하고 어려운 한인기업인을 지원하는 하는 등 애정이 많았던 분”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동향 기업인들을 위해서 부산~호찌민 직항로 개설에도 힘을 썼다. 2000년대 초반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 상공인들이 베트남에 많이 진출하면서 베트남 직항로 개설이 절실했다. 그는 2002년 쩐 득 르엉 국가주석에게 건의해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노선 운항 손실 발생 시 태광이 전액 보상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다.

2003년 11월 주 2회 베트남항공사에게 부산 취항을 허락받았다. 부산~호찌민 직항로는 양국의 교류협력과 우호 증진, 경제인들의 비용과 시간 절감, 베트남 관광산업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2014년 그에게 한국인 최초로 3급 노동훈장을 수여했다.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우승시키며 박항서 감독이 받았던 것과 같은 훈장이다. 2017년에는 회사와 노조의 중요한 공헌을 인정해 태광비나 회사 차원으로 2급 노동훈장이 수여되기도 했다.

베트남 한국 기업의 한 관계자는 "한때는 남연차 북우중(남쪽은 박연차, 북쪽은 김우중)으로 회자될 정도로 왕성한 사업을 벌여왔다“며 박연차 회장을 얘기하지 않고서는 한국기업의 베트남 진출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태광비나가 처음 진출했던 목바이 등 베트남 남부지역은 이제 봉제산업의 메카로써 수천여개의 한국기업들이 운집해있다. 베트남 진출분야가 다양해지고 교민사회가 다양하게 성장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호찌민 한인사회의 주요 구성원들은 신발 등 봉제산업의 주재원들이다.

호찌민 신발업계에 종사한다는 한 주재원은 “박 회장의 ‘사양산업은 없다. 사양기업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기억에 난다”며 “국내에서는 와닿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남부의 봉제사업은 여전히 활황세”라고 말했다.

벌써부터 베트남의 한 언론에서는 그의 사망소식을 두고 베트남 정부가 그를 위한 비공개 추모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그와 생전에 막역했던 각 지방성 당서기들이 대거 태광비나를 방문하겠다는 소식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신발업계의 거목은 이렇게 떠났다. 물론 이제는 태광비나가 예전처럼 베트남 내 최대 한국기업도 아니고 절대적인 영향력도 아니다. 삼성, LG 등 대기업들이 몰려와 더 큰 자금력을 바탕으로 베트남 사업을 벌이고 있는 추세다. 베트남 정부 또한 이제는 노동집약적인 신발·봉제사업보다는 첨단 산업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방침이다. 어쩌면 최근 자리잡는 신규 교민들과 베트남 신세대들에게 박연차 회장은 곧 잊혀질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트남 남부 한인사회의 발전과 아세안 지역 최대 한인밀집지역인 푸미흥의 성장은 태광비나를 비롯한 봉제산업의 발전없이는 쉽게 상상하기가 힘들다. 베트남 도이머이 1세대 공산당 멤버들과 한인사회 1세대들은 그를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베트남 한인사회의 대부로 그가 남긴 유산들을 기억하며 박 회장과의 마지막을 추억할 것이다.

태광비나가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당시 베트남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 전직 외교관은 그를 추모하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언젠가는 박 회장이 좋은 일이 있었던지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서 호탕하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사건과 부침이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베트남을 진정 사랑했던 한국인이자 호기와 박력이 넘쳤던 한 시대의 기업인으로."


 

1일 오후 경남 김해시 조은금강병원 장례식장에서 마련된 고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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