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왜 베트남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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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조선대 교수,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입력 2019-12-2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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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교수]



<베트남 ZOOM IN> 필자 안경환(安景煥) 조선대학교 교수 =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주경제는 최고의 베트남 전문가로 통하는 안경환 교수의 '베트남 ZOOM IN'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안 교수는 1955년 충북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의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휘장, 평화우호 휘장을, 호찌민시로부터 휘호, 응에안 성으로부터 호찌민 휘호를 받았고, 베트남문학회에서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10월 12일에는 하노이 수복 60주년 기념으로 하노이시에서 '수도 하노이 명예시민'으로 추대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2017년 11월 20일에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 개교 6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동문 6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12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훈장을 수훈했다. 2014년부터 한국베트남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왜 베트남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는가? (1)


∎ 상대방을 끝 이름으로 부른다.
∎ 호찌민 주석만 성으로 부른다.
∎ 전국적으로 응우옌(阮)씨가 38.4%로 가장 많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름을 자주 바꾼다. 이름뿐만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도 바꾼다. 한국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독특한 문화이다. 베트남사람들은 왜 성과 이름을 바꿀까? 바꾸는 이유도 무려 11가지에 달한다. 상대방을 부를 때는 성(姓)을 부르는 게 아니라 끝 이름으로 부른다. 호찌민 주석만 유일하게 성으로 부른다. 호찌민 주석의 위대함을 차별화하기 위한 것이다. 끝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1개 성씨가 너무 많아 성으로 부르면 사람을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왜 이름을 바꾸는가? 그렇다고 작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성과 이름을 바꾸는 문화를 통하여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아보자.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기원전 2세기 전부터 성과 이름을 사용하였다. 부족국가 시대에 베트남에서는 쩌우(물소)부락, 저우(뽕나무)부락 등과 같이 동․식물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의 성을 살고 있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사용하였다. 그래서 한 마을 사람들은 성이 모두 같았다. 반면, 베트남의 절대 다수족인 낀(京)족의 성은 대부분 약 12세기에 걸친 중국의 지배기간(B.C 179-A.D 938) 동안에 중국인들이 베트남에 정착하자 중국 사람들의 성을 따라 사용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의 성씨는 호왕푸(皇甫)와 똔텃(尊室) 두 성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음절이다. 성씨별 분포를 보면 남․북 베트남 간의 점유율과 점유율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전국적으로 응우옌(阮)씨가 38.4%로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쩐(陳)씨 12.1%, 레(黎)씨가 9.5%를 점하고 있다. 모두 왕조를 세웠던 성씨들이다. 베트남사람들이 성을 바꾸는 이유는;

첫째, 반코안에 따라 성을 변경하였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낳았어도 일찍 사망하거나 아기가 병약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부모와 자식 간에 사주가 맞지 않는 것으로 믿었다. 특히, 자손이 귀한 집에서는 늦둥이를 낳거나 병약한 자식들에게 해가 미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잡귀가 아이들을 잡아가거나 해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당이나 사찰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자식을 일시적으로 팔아넘기는 예를 올리고, 자식을 사당이나 사찰에 입양시켰다. 성인(聖人)이나 부처의 자식이 되었으니 잡귀가 아이로부터 떠나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이 자식을 보호하고자 하는 소망이 어우러져 성인이나 부처의 가피를 입어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식의 길복(吉福)을 기구하고 화흉(禍凶)을 피하기 위하여 사당이나 사찰에 잠시 매매형식을 취하여 양육을 위탁하는 것으로 다분히 동양철학적인 사고방식과 주술적인 사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반코안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민족영웅 쩐흥다오(陳興道)장군을 모신 사당에 입양시키면 쩐(陳)씨로, 사찰에 입양시키면 머우씨로 성을 바꾸었다. 아이가 12세에 이르러 면역력이 생겨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이 되면, 자식을 되찾아오는 예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산다.

둘째, 강압에 의해 성을 변경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에 고려로 정치적 망명을 해서 정선이씨와 화산이씨 시조가 된 베트남의 두 왕자가 있었다. 베트남 리(李)왕조(1009~1225)의 국난을 피해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다. 역성혁명으로 리(李)왕조를 폐하고 쩐(陳)왕조를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쩐투도(陳守道)는 백성들로 하여금 리(李) 왕조를 망각시켜 왕조 복원 운동의 근원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232년 리(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응우옌(阮)씨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것이 현재 베트남에서 응우옌(阮)씨가 가장 많은 점유율을 갖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강압에 의한 성의 변경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511년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호앙응이어푸(黃義富)는 원래 조상의 성이 호앙(黃)씨였으나, 리 왕조 마지막 9대 왕인 찌에우호앙(昭皇)의 휘(諱)와 중복된다 하여 찐(鄭)씨로 성을 변경하였다. 찌에우호앙(昭皇)은 즉위 1년 만에 쩐(陳)씨 세력의 강압에 못 이겨 남편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혈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찌에우호앙(昭皇)은 여왕으로 리(李)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가 남편에게 왕위를 양위하여 쩐(陳)왕조 초대 왕의 중전이 된 특이한 역사의 장본인이다. 호앙응이어푸(黃義富)는 쩐(陳)왕조에서 후손들이 이미 쩐(陳)씨로 변경하였는데, 다시 원래의 성씨로 돌아갔다가 1511년 강압에 의해 성이 다시 찐(鄭)씨로 바뀌었던 것이다. 성씨가 변경된 순서를 보면, 호앙(黃)-쩐(陳)-호앙(黃)-찐(鄭)-호앙(黃)씨로 성씨가 4번씩이나 변경된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후기까지 남북 베트남의 찐(鄭)-응우옌(阮)씨 세력다툼 기간에 찐(鄭)씨 지배하에 있던 북부 베트남에서는 응우옌(阮)씨 성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까오(高)씨로 변경하도록 강요당한 사례도 있다.

셋째, 봉국성(封國姓)과 사성(賜姓)으로 변경하였다.

사성(賜姓)이란 봉건 군주시대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왕 자신의 성을 따르도록 하거나 왕이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성을 하사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사성의 경우는 사학자 스히냔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본래 쩐(陳)씨였으나 역사서 다이비엣스륵(大越史略)을 편찬하여 쩐조의 왕으로부터 스(史)씨로 사성을 받았다. 공신에게 왕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것을 봉국성(封國姓)이라고 한다. 봉국성의 예는 한국역사에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응오뚜언(吳俊)을 들 수 있다. 중국의 송나라 군사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영토를 확장한 응오뚜언에게 리(李)왕조의 성종(1054~1072)은 리트엉끼엣(李常傑)으로 개명하도록 하였다. 공신에게 왕의 성을 하사하는 특별한 은전을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이 왕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것을 퐁꾸옥띤(封國姓)이라고 한다. 15세기에 명나라 20년간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레 왕조를 세운 레 타이또(太祖)는 227명의 공신들에게 왕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공신 가운데 1등 개국공신인 응우옌짜이(阮薦)는 레짜이(黎薦)로 개명하였다. 부녀자는 봉국성(封國姓)과 사성(賜姓)의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으며, 봉국성(封國姓)과 사성(賜姓)은 봉건 군주시대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왕이 신임을 표하고, 공을 치하해 주는 통치수단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넷째, 정치적인 목적으로 변경하였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정치적인 일을 도모하거나 외교적인 실수로 죄를 지은 사람이 목숨을 구하려고 할 때 도피를 용이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을 바꾸는 것이다. 쩐(陳) 왕조 시대의 응우옌캉(阮康)을 예로 들 수 있다. 응우옌캉(阮康)은 원래 귀족 쩐응우옌후이(陳元煇)집안의 노비였다. 그는 노비였으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중부 베트남에 있었던 짬빠국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국익에 반하는 죄를 범하였다. 이에, 간첩죄로 인한 처벌이 두려워 이름을 쩐티엠빈(陳添平)으로 개명하고 라오스를 거쳐 중국 명나라로 도망을 갔다. 명나라에 도착하고 나서 자신의 구명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그를 베트남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당시 쩐(陳)왕조는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수립되었다. 신생 호(胡)왕조는 그를 국경에서 붙잡아 극형에 처하고 말았다. 또한, 따반풍(謝文奉)은 대불 항쟁 시기에 국민들로부터 독립항쟁의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레주이민(黎維明)으로 개명하였다. 이는 레(黎)왕조의 왕실 후손임을 내세워 항불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지지 세력을 모으는 데 용이하게 하고자 개명을 한 것이다.

다섯째, 입양에 따라 변경하였다.

입양을 하면 입양자의 성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베트남 민법 189조에 따르면, 피입양자는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입양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입양되는 가족의 성(姓)을 따라야 한다. 본래의 성(姓)은 입양되는 가족의 성(姓) 뒤에 기재한다. 입양에 따른 성의 변경 사례는 15세기 초에 호(胡)왕조(1400~1407)를 세운 호꾸이리(胡季釐)가 대표적이다. 그의 조상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10세기 중엽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호흥젓의 후손이다. 호흥젓의 4대손인 호리엠이 당시 세력가인 레후언 집안에 입양되어 호꾸이리를 낳았다. 그래서 호꾸이리가 태어날 때의 이름은 레꾸이리(黎季釐)였다. 레꾸이리는 쩐(陳)왕조(1225~1400)를 폐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다이우(大虞)라 하고, 자신의 성을 조상의 원래 성씨대로 되찾은 인물이다. 또한, 응우옌 왕조 2대 민망 황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레반코이는 원래 자신의 성(姓)이 응우옌(阮)씨였다. 8대 조상이 친모의 성을 따라 베(Be)씨로 바꾸었다가 후대에 다시 원래의 성씨인 응우옌(阮)으로 개명하였다. 응우옌 왕조의 사이곤 총진(總鎭)이었던 레반쥬엣(黎文悅)의 양자가 되면서 성이 레(黎)씨로 바뀌어 레반코이로 개명된 것이다.



 

[호찌민 주석]]

[1010년 수도를 하노이로 천도한 이태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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