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2-13] 역대 日대표 팽창주의자 본향이 야생무궁화 군락지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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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선 기자
입력 2019-06-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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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무궁화 통사(5)

  • 역대 일본 대표 제국·군국주의자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

  • 官學 '손발' 맞춰 한반도를 무궁화 자생지로 조작

  • 무궁화 수없이 노래한 하이쿠와 단카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부상(扶桑 무궁화나라 일본)과 근역(槿域·무궁화지역 한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조선통감, 1909년 7월 5일>

"무궁화 묘목을 심는 것이 티격태격 싸우는 조선인의 의무다."
<테라우치 마사다케 초대 조선총독, 1912년 3월 19일>

"빗속에 비가 내리며 속삭이네, 내 마음은 창밖 너머 희뿌연 백목근(白木槿)인 것을."
<사이토 모키치(斎藤茂吉, 1882~1951), 1921년작 다이쇼(大正)시대 대표 와카>

"칠월의 끝 무렵을 무궁화가 피어 가만히 놔두지 않네."
<다네다 산토가(種田山頭火, 1882~1940), 쇼와(昭和) 시대 대표 하이쿠>

"참 화창한 날에 일장기로구나 하얀 무궁화."
<미사 테츠카(手塚美佐, 1934~), 현대 일본 대표 하이쿠 시인>

"붉은 태양을 흰 배에 실었는가 무궁화 일본."
<강효백, 「일장기(日の丸)」 하이쿠>


◆역대 일본 대표 제국·군국주의자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인 까닭은?

무궁화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에 자생하는 꽃나무다. 그중에서 혼슈 동남단 현 와카야마(和歌山)현과 서남단 야마구치(山口)현엔 야생 무궁화 군락지가 있다.

후쿠오카에서 북쪽으로 1시간 남짓 달리면 동해와 세토(瀨戶)내해를 끼고 있는 야마구치현이 나온다. 야마구치현 방방곡곡 공원과 거리 국도, 철도 주변에는 무궁화가 자생해 있다. 특히 야마구치현 하기시(萩市) 가와카미촌(川上村)의 야생무궁화 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야마구치현은 현대 일본 보수우파와 제국·군국주의 정치의 발상지다.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해 현 총리 아베 신조까지, 총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현으로 유명하다. 일본 극우의 총본산인 아베 총리가 회장으로 있는 일본회의의 뱃지가 무궁화 문양인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야마쿠치현은 43개 현 중 여당 득표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천양무궁(天壤無窮, 일왕영토의 무궁한 확장)을 헌법과 교육칙어에 넣은 메이지 일왕–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1894년 조선의 갑오동학 혁명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무궁화를 형상화한 군기인 욱일기를 단 일본군은 아산만과 평양전역에서 대승 후 전리품으로 대만을 할양받고 조선의 통치권을 획득했다. 조선은 갑오경장이라는 이름의 일제식 체제로 전환(경장)됐고, 일본식 용어와 문화 문물이 조선 땅에 쇄도했다.

1896년 11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멘토로 삼고 그와 오래 전부터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윤치호(이토지코)는 무궁화를 애국가의 가사에 넣고 나라꽃으로 작업했다.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무궁화가 수식된 관복을 정하는 1900년 관복에 칙령 제14호로 제정되었으나, 1906년(광무 10년) 고종황제는 무궁화꽃을 대한제국의 황실화 오얏꽃으로 환원했다.  대한제국(1897년 10월12일~1910년 8월29일)의 각종 공문서에 표시하는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얏꽃 문장이 사용되었다.

1904년 8월22일,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오랜 조선인 심복, 외부대신서리 윤치호가 체결한 제1차 한일협약(갑진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상납받았다. 이듬해 1905년 11월 17일, 다시 외부협판 윤치호가 총괄 기획 작성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 통감으로 취임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 치하의 조선통감부는 경성의 백운동(청운동 서쪽)과 평양의 모란대 두 곳에 모범림을 설치하고, 수원 대구 평양의 3곳에 묘포(苗圃)를 설치해 파종하는 한편 무궁화 묘목을 포함 1·2년 생 일본산 묘목을 옮겨와 심었다.

1909년 7월5일 소네 아라스케는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조선통감을 이어 받는 연회에서 "부상(扶桑·무궁화나라 일본)과 근역(槿域·무궁화지역 한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를 읊었다.(1)*

소네 통감은 통감 취임 일주일 만에 7월 12일 기유각서를 체결,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모든 실권을 소네의 권력으로 전격 탈취했다.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역시 조선이 무궁화 지역, 즉 근역(槿域)(2)*임을 강조했다.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제3대 한국통감부 통감으로 부임, 한일 합방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총독이 된 인물이다. 1916년 총리대신이 돼 시베리아 전쟁 등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의 권익 확대를 꾀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다.

1912년 3월 26일 데라우치 초대 총독은 1912년 3월 “태형은 조선인에 한한다”는 악명높은 <조선태형령>을 공포하면서 “무궁화 묘목을 심는 것이 티격태격 싸우는 조선인의 의무”라는 조선인을 비꼬고 모욕하는 시문을 남겼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官·學 '손발' 맞춰 한반도를 무궁화 자생지로 조작

데라우치 총독 치하의 조선총독부 식산국은 1912년 12월 다이쇼(大正, 원년) 조선총독부관할 국유림 일부를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큐슈제국대학 등 일본 제국대학들에 연습림으로 대부해 줬다.

도쿄제국대학에는 전라남도 구례군과 광양군내 백운산∙감토봉∙지리산 일대에 총 4만6685정보를 연습림으로 할당하고, 이듬해부터 금송(고야마키·高野槇), 적송(아카마쓰), 낙엽송(카라마츠), 편백나무(히노키), 삼나무(스기), 무궁화, 황매화 등 총 3만3000그루를 식수하게끔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못된 1914년 3월, 한국의 식물학계 일각이 아직도 스승으로 삼고 있는 일본의 저명한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은 그동안 귀화식물줄로만 알았던 한반도 무궁화 야생군락지의 존재를 발표했다.

그런데 나카이가 발견했다는 무궁화 자생지는 공교롭게도 순천과 구례군 광양 등 전라남도 남부지역이다. 관이 침략의 창(唱)을 노래하면 학은 조작의 추임새를 넣는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스킬은 참으로 간교 노회하고 조직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같은 해 미국의 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 Crane, 1887~1973) 여사가 전남 순천과 구례군 주변에 자생하는 무궁화를 발견했다고 한다. 1931년 이 무궁화를 보고 그렸다는 수채화를 실은 그림책 『한국의 꽃 민간전래 이야기(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이 도쿄에서 출판됐다.

그런데 1914년 이후 2019년 6월 현재까지 전라남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는 무궁화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궁화 자생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1974년 일본의 도이임학진흥회(土井林学振興会)는 『한반도의 산림(朝鮮半島の山林)』 이라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헐벗은 한반도의 산을 녹화시켜 주었다고 자랑하는 책을 펴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18년~1942년 25년간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 약 17만7300헥타르(제주도 전체 면적 상당)에 6억662만4000그루 나무를 심었다. 주요 식수 수종은 아까시나무, 싸리나무(하키), 고야마키(금송)(3)*, 적송, 편백나무, 삼나무, 가이즈까 향나무(龍柏), 홍단풍, 벚나무, 낙엽송, 무궁화, 황매화 등 거의 일본산 나무다.

◆쇼와 시대 천양무궁·황위무궁 무궁화 감격시대

1926년 12월, 제124대 일왕으로 즉위한 히로히토(裕仁, 1901~1989) 쇼와 시대 제국주의 군국주의 천양무궁(天壤無窮, 일왕영토의 무궁한 확장)의 무궁화는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의 전방위 전천후로 극성기를 맞이한다.

1928년 1월, 야마구치현 하기시 가와카미촌(川上村)의 야생 무궁화군락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이어 1930년엔 고쿄히가교엔, 신주쿠, 우에노, 요오기, 히가시, 하마리큐 진다이(神代)식물 공원 도쿄의 공원을 비롯 일본 전역의 공원과 정원에 무궁화 화원을 별도로 조성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1년 9월 18일, 선양 부근 남만주철도인 류탸오후(柳條湖) 폭파를 구실로 일본 관동군은 그해 11월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1932년에는 마지막 황제 부의를 괴뢰로 앉혀놓은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어 1933년에는 내몽골의 동부와 허베이성의 동북쪽 르허(열하)지방을 점령해 만주국에 편입하고 그해 5월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중국의 심장부까지 진출하였다. 이미 ‘대일본제국’의 천양무궁 판도는 해양을 뺀 육지 면적만 치더라도 중국 본토보다 훨씬 넓어졌다.

◆무궁화를 노래하는 수백만 수의 하이쿠와 수십만 수의 단카

무궁화를 주제로 한 하이쿠(俳句, 5∙7.5의 3구절 17음절)는 에도시대(1603~1867) 275년 간 불과 10여수에 불과했으나, 메이지와 다이쇼시대(1867~1926) 60년간 200여수의 하이쿠가 쏟아졌다. 쇼와 시대(1926~1989)부터는 수만 수, 수백만 수까지 폭증했다.

천양무궁 일제의 영토확장에 비례하듯 무궁화 주제 하이쿠도 폭증한 것이다.

1934년 4월 히로시마에는 무궁화 단카(短歌, 5 ·7 ·5 ·7 ·7의 5구절 31음절)회가 단카 월간시집이 창간됐다. 1994년 창간 60주년 기념집 1만수 선집을 발간했으며, 2019년 6월 현재에도 계속 출간되고 있다. 무궁화를 주제로 한 하이쿠나 단카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해 ‘日’ 이다. 즉 무궁화=태양=일본, 무궁화를 태양과 일본으로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남궁억은 무궁화 보급 아닌, 비밀 애국활동 벌이다 탄압

 

[자료=강효백 교수]

대다수 국내 문헌은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치던 중 일제에 의해 1933~1935년 구속됐다고 적고 있다. 과연 그럴까?

한서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윤치호와는 사돈간이다. 남궁억이 칠곡부사일 때 사돈인 윤치호에 의해 무궁화를 소개받았다. 남궁억은 순열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이고, 윤치호는 기독교를 빙자한 종일매국노의 대부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남궁억은 1918년 건강이 악화돼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골, 모곡(牟谷)으로 낙향했다.

1919년 9월 모곡학교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애국적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남궁억의 애국사상을 접한 홍천 모곡리 일원의 일부 기독교 감리교계 목사와 신자들은 1933년 4월 하순 ‘공존공영의 지상천국 건설’을 목표로 십자가당을 결성했다. 십자가당 결성 직후 점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신규 위원을 늘려 나가고 있던 중 11월 4일 홍천 주재소 일본 경찰들이 남궁억과 그 주변 인사들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십자가당 일원이자 남궁억의 제자로 모곡학교 교사를 지낸 김복봉의 일기장을 압수하여 검토하는 과정에서 십자가당의 전모가 드러났다.

홍천 지역 비밀결사 조직을 파악한 일경은 수십명의 십자가당 당원 전원을 즉각 체포, 심문했다. 이들은 40여 일간 일제 경찰에 혹독한 취조를 받았는데, 무궁화 보급운동에 참여했던 모곡학교 교사들은 남궁억 외에는 모두 석방됐다.

남궁억과 십자가당 골수10여명은 경성으로 송치돼 총독부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1934년 8월 3일 남궁억, 유자훈, 남천우, 김복동이 최종적으로 공판에 회부되어, 1935년 1월 31일 남궁억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개월, 유자훈과 남천우는 각각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김복동은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 4월 20일 강원도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에 보낸 비밀문건(江高秘 제826호)에 따르면 남궁억· 남천우· 이윤석은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었고, 유자훈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십자가당은 기독교·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3가지 상호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을 기독교의 삼위일체식으로 합일시켜 ‘공존공영의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이러한 3가지 사상을 융화시켜 일본제국주의에서 한민족을 해방시키고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종교운동가 겸 사회개혁가로서 남감리교를 통일한 요한 웨슬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한 레닌 등을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았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보면, 십자가당은 기독교에 기반한 민족 사회주의를 추진하려던 비밀 결사였음을 알 수 있다. 남궁억 선생이 일제에 의해 체포 투옥된 원인은 무궁화 보급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에 기반한 민족사회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 보급을 탄압당한게 아니라 일제의 무궁화 한반도 이식 작업에 부응하는 무궁화 보급을 내걸고 비밀 반일 애국활동을 펼치다가 일제에 탄압당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에 무궁화가 흔히 있었더라면 남궁억 선생이 굳이 무궁화 보급운동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주석

(1)*1909년 7월 5일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돌아가며 함녕전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이 시제를 내렸다. 이토히로부미, 모리오노리(森大來), 소네아라스케(曾彌荒助), 이완용이 연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합작시를 지었다.
단비가 처음내려 만사람을 적셔주니(甘雨初來霑萬人-이토)
부상(일본)과 근역(한국)을 어찌다르다 논하리오 (扶桑槿域何論態 - 소네)
함녕전위에 이슬빛이 새로워지니 (咸寧殿上露革新 -모리)
두 땅이 하나가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兩地一家天下春 - 이완용)


(2)*근역은 1910년 8월 29일 메이지 덴노의 한일합방 칙서에 사상 최초 등장한 단어.

(3)*일명 고야마쓰(高野松) 또는 금송(錦松)으로 불리는 일본 교토의 남산인 고야산(高野山)의 특산으로 박정희가 현충사와 도산서원등에 심었으나 2018년 9월과 11월에 각각 문재인 정부에 의해 퇴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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