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한국戰 종전선언' 소문 도는 날 전설의 AP통신 기자를 추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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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19-02-2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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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인 이날 서울에는 비가 내렸다. 집에서 이삿짐을 꾸리다 오전 11시경 서울 상공에 낯선 항공기 2대가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을지로 사무실로 전화를 해 보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지금 어디에 있나? 뭔가 심각한 일이 터진 것 같다. 바로 들어와!" 부랴부랴 사무실로 달려가자 가득 흥분된 얼굴의 보스는 뉴욕에서 날아온 '로켓(rocket)'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해방 후 미국에서 유학 생활 보낸 후 한국전쟁 발발 불과 4개월 전에 AP 통신 서울 지국에 입사, 가장 뼈아픈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목격하고 보도했던 신화봉 (영어명: Bill Shinn)기자의 회고 내용이다. 여기서 '로켓' 이란 본사 데스크에서 내려오는 긴급 메시지로, 주로 타경쟁사의 보도 내용을 즉시 체크해서 대응하라는 지시이다. 이날 UP통신(현재 UPI)의 잭 제임스 기자가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는 기사를 오전 9시 50분에 타전한 뒤, AP 본사가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신 기자는 국방부와 군부대 미 대사관 등 여기 저기 취재원에 전화를 걸어본 이후,  제임스 기자가 엄청난 특종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임스 기자는 이날 오전 일찍 레인코트 우의를 가지러 반도호텔에 있던 미 대사관 프레스룸으로 향하다가 미 정보원을 우연히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그는 이 정보원으로부터 북한군이 "전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것 같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제임스 기자의 특종 기사는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타전한 보고보다 빨랐다.

한국전쟁 발발의 첫 보도는 경쟁사의 제임스 기자에게 놓쳤지만, 신 기자는 이후 3년간 종군기자 중에서 '특종 제조기'로 알려져 있다. 서울이 수일 만에 함락된 후, 자신의 포드 승용차를 운전해 급히 탈출하다 북한군에 포위됐으나, 신분증을 몰래 버리고 자신을 '부자의 운전기사'라고 주장한 뒤 위기를 벗어났다. 미국 통신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기자라는 신분이 밝혀졌다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Korea Witness: 은행나무]

인천상륙작전, 미군 발표보다 9시간 빨리 보도


서울외신기자클럽(SFCC)이 설립 50주년을 맞아 2006년 발간한 '코리아 위트니스'(Korea Witness)에는 신 기자의 활약상이 잘 기술되어 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인천상륙작전, 1952년 5월 7일 거제도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전쟁포로 난동 (포로 수용소 미군사령관이 공산군 포로의 포로가 된 사건), 1953년 5월 휴전협상을 벌이던 유엔사측이 대폭 양보안을 극비로 제안한 사실, 이승만 대통령의 전격 반공포로 석방. 여러가지 대형 사건에서 특종 보도를 거듭하며 '스쿠프(Scoop·특종) 신"이라고 불렸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총사령관을 지낸 정일권씨는 회고록에서 신 기자가 UN군의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을 이틀 전에 미리 보도하는 '위험한 특종'을 했다고 밝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신 기자는 도쿄주재 특파원들과 부산 주둔 미 해병대 소식통으로부터 이 작전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중대한 기밀을 아무리 종군기자라도 미리 보도하는 것은 '이적 행위'로 처벌 받는다는 사실을 너무 숙지하고 있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 인천으로 향하던 함정에 타지 못한 그는 부산에서 작전 당일 아침 모든 인맥을 동원, 상륙 성공 사실을 수차례 확인했다. 신 기자는 작전 성공을 확인한 후 국방부를 설득해, 정 총장의 발표 형식으로 역사적인 1보 타전을 했다. 미군 사령부 공식 발표보다 9시간 앞선 세계적 특종이었다. 


종군기자, 뼈아픈 역사 산증인으로 ..휴전 협상서도 '대활약'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휴전 회담. 만 2년에 걸쳐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개최됐다. 22개월째 질질 끌던 회담은 1953년 5월 유엔사측이 남한측에 불리한 대폭 양보안을 비밀리에 내놓으면서 급진전을 보인다. 신 기자가 이를 특종 보도했고, 이 기사는 당시 휴전 협상이 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의 주장과 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당시 임시 수도이던 부산에서 대규모 휴전반대 국민대회가 개최된다. 이승만 대통령도 휴전이 아니라 ‘북진통일’을 원했고, 미국 주도의 일방적인 휴전협정 추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6월 18일 누구와의 상의없이 북한군 출신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도 없을 것을 판단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다.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을 처음 보도한 사람도 신 기자다. 

역사상 가장 치열했고 부끄러운 전쟁을 멈추게 한 협정은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체결되었다. 당시 UN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웨인 클라크, 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서명을 했다. 이 정전 협정으로 남북은 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에서 종군기자로 대활약을 한 신 기자를 공보처장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저널리스트의 길을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한다. 1957년 AP를 떠난 후에도 세계통신사와 미군 성조지에서 일하다가 1964년 일본으로 건너가 시사통신사 동경지국장을 지내고 한반도 문제 전문 '시사평론'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 말 미국으로 이주했고 2002년 10월 7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는 1918년 함경남도 함주군 장진(長津)에서 출생했다. 1950년 겨울 중공군 12만명에게 포위당한 미군 1만3000명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는 1945년 8월 30일 소련군의 점령으로 공산화된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이후 고향에 남겨둔 노부모와 세 누이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언론인 신화봉: :AP기자가 본 동경·서울·평양' (신화봉 저']

 

그의 저서 'The Forgotten War Remembered'는 우리에게 잊힌 전쟁이 실제 어떤 모습이었는지 일부나마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휴전 상태이다. 하늘에서 신 기자가 오늘부터 진행되는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종선선언'에 대한 합의가 나올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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