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스물 셋, 청년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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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입력 2019-02-2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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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일본 가나자와(金澤)에 윤봉길 의사 암장지가 있다. 윤 의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투척,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중국이 아닌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이 집행됐고, 일제는 왜 시신을 몰래 묻었을까. 또 13년 만에 유골이 발견되고 서울 효창공원으로 이장된 과정도 못내 궁금하다. 윤 의사 의거와 사형 집행, 암장, 국내 송환 전모를 안다면 숙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윤 의사 손녀인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 퇴임을 둘러싸고 여야가 정치 공방을 벌이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4월 11일) 100년을 맞는다. 윤봉길 의사 행적을 통해 부끄러움을 생각해 본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윤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일곱 글자를 남기고 압록강을 건넜다. 뜻을 이루기 전까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그때 나이 23살, 아내와 두 아이를 두었다. 그리고 2년 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에서 폭탄을 투척한다.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몇 몇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제9사단장 우에다와 주중 공사 시게미쓰는 크게 다쳤다. 시게미쓰는 훗날 외무대신에 올랐다. 그는 이날 오른쪽 다리를 잃고 평생 의족과 지팡이에 의지해 살았다.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리를 절룩이며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 그다.

일제는 윤 의사를 가나자와로 이송, 그해 12월 19일 사형을 집행했다. 가나자와를 선택한 이유는 복수를 위해서다. 당시 상하이에 주둔했던 제9사단 본거지가 가나자와다. 윤 의사 의거로 9사단은 체면을 구겼고 9사단장도 불구가 됐다. 그러니 가나자와는 앙갚음을 위한 장소다. 지금은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다. 현장을 안내한 박현택(75)씨는 ‘윤봉길의사 암장지 보존 월진회 일본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에게 가나자와에서 사형집행, 육군묘지 앞에 암매장, 암장지 발굴 비화까지 상세히 들었다. 봄, 가을 두 차례 참배 행사 후 나오는 쓰레기도 암장지에서 태웠다고 한다.

암장지 코앞에 일본군 육군묘지가 있다. 일제는 시신을 참배객들이 오가는 통로에 묻었다. 윤 의사 시신을 밟고 다니며 분풀이를 위해서다.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 선생은 첫 번째 과업으로 독립운동가 유골 발굴에 나섰다. 가나자와에 살던 동포 50여 명이 발굴에 참여했다. 1946년 3월 3~6일까지 발굴은 박 지부장의 큰 아버지인 박동조, 아버지 박송조가 주도했다. 애를 태우던 중 야마모토 료도라는 여자 스님이 단서를 제공했다. 윤 의사를 묻기 전에 염불했던 스님이다. 유골은 그해 고국에 돌아와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백정기 이봉창 의사와 나란히 묻혔다. 김구 선생 묘역도 가까이 있다.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루쉰 공원으로 개명)에 윤 의사를 기린 매헌정(梅軒停)이 있다. 10여 년 전 이곳에 들렀다 먹먹했다. 거사 직전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쥐고 찍은 사진과 ‘장부출가 생불환’은 강렬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일본 가나자와 암장지에서 또 부끄러웠다. 뜻을 품고 집을 나선 23살, 그리고 죽음을 맞은 25살. 나는 그 나이가 훨씬 넘도록 무엇을 했는지 자문했다. 윤 의사는 훗날 “사랑스런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고 썼다. 그 역시 가족을 소중히 했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안온한 삶은 윤 의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희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현택씨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일본 우익이 드센 가나자와에서 꿋꿋하게 윤 의사 암장지를 지키고 있다. 직업은 대리운전이다. 90을 넘긴 아버지를 간병하고 생계를 위해서다. 친일파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언론보도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75세, 일본 땅에서 대리운전을 하며 윤 의사 암장지를 지키는 그에게 죄송했다. 박씨는 우리말과 이름을 고집하며 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눈엣가시다. 컬럼을 쓰기 위해 그와 긴 통화를 했다. 어제가 생일이라서 오늘은 쉬고 있다는 박씨는 어제도 밤샘 대리운전을 했다고 한다.

처자를 뒤로한 채 압록강을 건넌 23살 청년 윤 의사, 갖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일본 우익과 싸우며 암장지를 지키는 75살 박씨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친다.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매년 100주년’이란 마음으로 독립운동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퇴를 종용한 국가보훈처에 대해 “자신들이 뭘 해야 하는지 인식이 부족했다. 임기를 2개월 넘게 근무했다고 해서 사퇴 종용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며 씁쓸해 했다. 한국당이 이를 정치 쟁점화하자 윤 전 관장은 “청와대 뜻은 아니었다”고 했다. 청와대 역시 “오히려 청와대가 말렸다”고 해명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보훈처가 청와대 뜻과 달리 앞질러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을 지낸 윤 전 관장의 처신에 대한 비난도 적지 않다. 어쨌든 윤 의사 손녀까지 정쟁에 휘말리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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