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스토리'가 김해숙에게 남긴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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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희 기자
입력 2018-06-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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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에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는 배정길 역을 열연한 배우 김해숙이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강렬한 첫 경험이었다. 연기 경력 44년 만에, 처음 느낀 낯선 감각은 배우 김해숙(63)을 두렵게 만들었다.

“데뷔 44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이런 감정을 겪어 본 적이 없으니 겁도 없이 시작한 거죠.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했을 텐데…. 나름대로 감정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역할도 소화해보고 후유증 같은 건 없었는데 이 작품은 블랙홀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처음이었어요. 하면 할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무겁고 끝을 모르겠더라고요.”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제작 수필름·배급 NEW)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오직 본인들만의 노력으로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로, 당시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뤄냈음에도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재판’ 실화를 소재로 했다.

이번 작품에서 김해숙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 일본에 당당히 맞서는 배정길 할머니 역을 맡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작품, 캐릭터를 만난 베테랑 배우지만 영화 ‘허스토리’ 속 배정길 역은 김해숙에게 많은 상처와 흔적을 남겼다.

“나도 꽤 많은 작품을 했는데 지금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이건 나라는 존재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에 빠져드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들어가더라고요.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어요. 어떻게 그것들에 다가갔는지 모르겠어요. 저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요.”

영화 '허스토리'에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는 배정길 역을 열연한 배우 김해숙이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실존 인물이기도 한 배정길 할머니 역할을 몸소 거친 그는 우울증까지 겪으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소 낙천적인 성격”으로 우울증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는 영화 ‘허스토리’가 남긴 강렬한 첫 경험에 놀랄 지경이라고.

“제가 이 정도로 깊은 곳, 걱정할 정도까지 올 줄 몰랐죠. 하하하.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우울증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찍고) 모든 사물이 슬퍼 보이고 무기력해지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몸이 아픈 건가?’ 싶어서 건강진단을 해봤죠. 우울증이라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무서워져서 ‘내 방식대로 이 우울증을 타파해야겠다’고 생각, SBS 드라마 ‘이판사판’에 합류했어요. 정반대의 캐릭터를 만나면 다시 밝아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웬일인지 드라마가 끝나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요. 잔류 되는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천천히 나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이제야 감정이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잘 모르면서 인물에게 다가가려고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자평하는 김해숙. 그는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고, 아팠다며 조심스레 속내를 털어놨다.

“실존 인물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의 폭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배정길 할머니는 이랬을 거야, 이때는 이런 감정이셨을 거야 하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안 계신 분이니 더 조심스럽고 걱정도 되고 고통스러웠죠.”

질문과 질문이 꼬리를 물고 ‘도돌이표’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김해숙은 할머니가 살아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모든 ‘생각’을 지우고 연기를 시작했다. “알아갈수록 분석적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

영화 '허스토리'에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는 배정길 역을 열연한 배우 김해숙이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할머니의 삶, 남아있는 유가족을 생각하면 연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나를 버리고, 김해숙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연기하려고 했어요. 김해숙이 보는 배정길 할머니조차도 버려야 했던 거죠. 딴 걸 보고, 알다 보면 후회가 될 것 같아서 그냥 시나리오에 충실해서 그 감정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정말 죽기 직전까지 했죠.”

김해숙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면,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을 맡은 민규동 감독이 나타나 그를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었다고. 그는 “오로지 감독님에 대한 믿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민 감독님께 정말 고마웠던 건, ‘어떤 인물이다’라고는 하면서 간섭하지 않았다는 거. 그리고 제게 큰 믿음을 주셨다는 거예요. 본인이 시나리오를 썼으니까 이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확고함이 있잖아요. 그 모습에 신뢰가 가고, 믿음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영화는 민 감독님이 만드는 거니까요. 하하하. 선장 역할을 굉장히 잘하셨다고 생각해요.”

김해숙은 영화 ‘허스토리’의 촬영 첫날, 첫 촬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재판장에 가는 할머니들이 시작이었다고. “소복을 입고 재판장에 가는데” 긴장이 풀린 적도 없고, 회차가 가면 갈수록 힘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예)수정씨, 문숙씨, (이)용녀씨는 물론 (김)희애씨, (김)준한씨까지. 재판 장면을 총 나흘 찍었는데 모두 놓치지 않고 모든 걸 쏟아부으려고 노력했어요. 그 신이 끝나면 모두 쓰러질 정도였다니까요. 몸에 있는 물기까지 다 빠져나간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재판 장면을 찍을 땐 물도 안 마셨어요. 입에 윤기가 도는 것조차 감정이 깨질 것 같더라고요. 모든 배우, 스태프들이 힘든 작업인데도 같은 마음으로 움직였어요. 감사하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죠.”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 그 간절했던 마음이 느껴져 “이 영화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면 좋겠냐”고 묻자, 김해숙은 “그 정도까지도 바라지 않는다”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냥, 많은 분이 귀 기울여주시고 이분들이 어떻게 사셨는지 알아주시면 돼요. 관부재판이 있었고 처음으로 작은 승리를 맛보았으며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고. 그것만 알아주셔도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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