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시네]이창동 ‘버닝’, 비닐하우스로 지은 7개의 메타포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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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입력 2018-06-2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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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의 한 장면.]



[스포多]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지만 집의 형상을 지닌 잠정적인 건축물이다. 비닐하우스는 집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은유로 번역되는 메타포는 ‘전이(轉移, 옮겨감)’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으며, 숨겨서 그것을 뜻하는 수사(修辭)법을 가리킨다.

영화는 인생같다,라고 말하면 직유법이지만 영화는 인생이다,라고 말하면 은유다. 이질적인 것이 갑작스럽게 동일화하는 바람에, 언어 사이에서 충격이 일어나면서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 은유가 노리는 효과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캐주얼하게 보면 싱겁고 느슨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곱씹어 보면 각각의 모티프(이야기 요소)들이 저마다 서로 은유로 걸려들면서 이야기의 함의를 갈수록 키운다. 우리 영화 중에선 보기 드문 방식의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싶다.

(1)위대한 개츠비의 메타포 게임

영화는 문예창작과를 나온 청년 백수 ‘종수’를 다룬다. 종수는 강남의 금수저 벤을 가리켜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주인공인 개츠비는 출처가 불분명한 부를 축적한 청년이다. 개츠비는 매일밤 저택에서 파티를 연다. 종수가 재회한 여자친구인 해미에게 벤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세 가지를 뒤튼다. 하나는 벤이 파티를 열어 두달마다 여자친구를 바꿔 노는 그 행각과 개츠비의 첫사랑에 대한 순정을 뒤틀어 보여주는 것, 또 하나는 흙수저인 자동차 수리공 윌슨에게 오해로 죽음을 당하는 개츠비와 ‘오해’로 죽음을 당하는 벤을 밑밥처럼 함께 깔아놓은 교묘한 복선이다. 마지막은 불에 타는 최후를 맞는 벤과 물 속에서 총을 맞아죽는 개츠비.

감독 스스로 비치긴 했지만, 영화를 한국사회의 흙수저와 금수저, 혹은 청년실업에 대한 분노로 읽는 것은 피상적인 눈일지 모른다. 사실 피츠제럴드도 소설 속에 1920년대 재즈시대의 빈부에 대한 비판을 담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보다는 훨씬 가벼운 ‘속고 속이기’의 놀이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심각한 사회주제를 골격에 넣은 까닭이야 없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이 땅의 현실을 짚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명(共鳴)의 크기를 겨냥했을 수 있다.

그것보다 버닝(burning)과 분노(火)가 불길이라는 지점에서 만나는 것을 의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종수 아버지(MBC 최승호사장이라니...)의 삶은 공무원을 두들겨팬 분노조절장애로 요약된다. 분노조절장애와 방화(放火,불을 지름)는 기묘하게 겹친다. 둘 다 ‘거대한 분노’나 축적된 비판의식에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분출에 가깝다. 미국에선 개츠비가 주인공이었지만, 한국에선 ‘윌슨’이 주인공인 점이 의미심장할지도 모른다.

(2)불타는 강남과 불타는 파주의 메타포 게임

먼저 불타는 강남. 벤을 미행하던 종수는 어느 갤러리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화가 임옥상의 그림 ‘삼계화택-불’이 대형사이즈로 걸려있다. 이 그림은 2009년에 일어난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것이다. 참혹한 불의 지옥에서 눈을 돌려 저쪽을 바라보니, 평화롭게 가족식사를 즐기는 듯한 벤이 보인다. 강남은 한 사회를 진동한 비극까지도 우아한 문화로 메타포화하여 장식으로 쓰고 있다. 용산의 불꽃그림 아래 선 종수의 실루엣과, 20미터쯤 앞에 펼쳐진 단란한 자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섬뜩한 대비로 서로 살아있다. 이 그림은 다시 영화적인 솔루션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불타는 파주.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인 파주의 노을은 해미의 거침없는 토플리스 춤과 함께 붉은 기운을 아프도록 드리웠다. 파주는 대남선전방송이 나오는 곳으로 ‘붉음’은 이념의 한 자락이기도 하다. 해미의 춤 위로 낡은 태극기가 꽂힌 깃대는 인상적이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파주, 그 변방의 거칠고 궁한 지도 위에서 여자는 춤을 춘다. 황지우가 말하듯 새들도 세상을 뜨는 그곳에서 처음부터 세상에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해미의 춤은, 그 무엇도 아닌 ‘절벽세대’의 눈부신 4차원이다. 강남의 버닝과 파주의 버닝은 그저 무뚝뚝한 병치다. 오직 타오르는 것과 그것을 가라앉히는 ‘돈’과 어둠의 위력을 보여줄 뿐.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영화 '버닝'의 한 장면.]



(3)검은 포르쉐와 백색 트럭의 게임

아버지가 구속된 뒤, 종수는 파주의 빈 집에 들어와 살면서 아버지가 타던 고물트럭의 임자가 된다. 트럭은 분노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셈이다. 벤은 미끈한 검은 포르쉐를 타고 나타난다. 이 두 개의 탈 것은, 흙수저와 금수저를 나누는 상투적인 아키타이프다. 나는 이 두 개의 차가 서로 다른 번지수에서 달리고 있을 때의 낯설고 어색함을 주목한다. 강남에 멈춰선 백색 트럭은 금방 노출되고 곧 쫓겨날 것 같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파주를 찾아온 검은 포르쉐는 튀는 배치임에 틀림없지만, 권태로운 부(富)가 찾아낸 잠깐의 일탈처럼 상쾌한 포즈를 취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자동차는 종수와 벤의 ‘사회적 인격’의 구실을 하는 게 이 땅의 정직한 현실이다. 해미는 한번도 종수의 트럭 위에 올라와 앉지 않았다.

포르쉐를 미행하는 백색 트럭을 지켜보는 일은, 어쩐지 조마조마하다. 포르쉐가 굳이 그런 트럭 따위를 신경 쓸 틈이 없다 하더라도, 너무나 눈에 잘 띄는 배치이기 때문이다. 종수가 벤의 행선지를 추적하는 까닭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벤의 진상’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세심한 벤이 과연 종수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걸 굳이 궁금해할 이유도 없지만, 소설가 지망생인 종수에게 자신의 삶을 전시하면서 상상의 폭을 키워주고 싶은 기묘한 욕망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포르쉐가 굳이 사람을 익사시킨 듯한 연못 앞에서 폼 잡고 서 있었던 것도, 범행의 꼬리를 밟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직하게 따라온 트럭운전사의 호기심을 한껏 충전해주기 위한 서비스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조롱이야 말로 포르쉐의 기분에 합당한 ‘베이스’일 수도 있다.

백색트럭은 새벽에 포르쉐를 유인하여 그 운전자를 죽이고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넣은 뒤 불태운다. 왜? 포르쉐의 조롱에 그토록 우직하게 응답했을까. 이것이 해미를 죽인 자에 대한 합당한 응징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비닐하우스를 불태운 자에 대해, 그의 굳건하고 아름다운 집인 포르쉐를 불태움으로써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성서적 정의를 실천하고 싶었던 걸까. 해미의 생사와는 상관없이, 백색트럭의 분노조절 장애가 승리를 거둔 걸까. 포르쉐의 소각은 범죄행위의 소각일까, 아니면 벤이 말한 것처럼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체험하기 위한 종수의 탐닉에 가까운 것일까.

(4)고양이와 송아지의 게임

해미는 서울 남산 아래 용산구 후암동 원룸에서 생활한다. 햇살이 비치는 유일한 시간은 근처의 남산타워 유리창에 비친 태양이 반사되어 들어올 때 뿐이라는 묘사는 ‘빈곤의 서정’을 후벼판다. 해미는 거리판촉 행사를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파주 고향친구 종수에게,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동안 고양이 밥을 줄 것을 부탁한다. 이 고양이는 유기(遺棄)묘로 얼마전 보일러실에서 발견해 데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보일’이다. 사람에게서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낯선 이를 몹시 겁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귀띔을 한다. 해미의 이 말이, 하나의 게임이 된다. 종수가 고양이 밥을 주는 동안 한번도 녀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똥이 있고 또 밥이 비워지는 걸로 봐서 고양이가 숨어있는 것으로 짐작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웃주민의 말이 의문을 더 키워준다. “고양이 본 적 없는데? 이 아파트에선 고양이 못 키워요." 감독은 고양이의 실체를 반쯤 지워놓는다. 하지만, 해미가 실종되고 난 뒤, 벤의 집에서 발견된 고양이는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보일아“라고 부르자 경계를 풀고 다가온다. 이것이 해미의 고양이였다는 암시를 풍기는 사건이지만, 확증은 없다. 그 고양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언리얼과 리얼의 게임이다.

송아지는 파주의 집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의 가축이다. 종수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되는 것은 송아지를 건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해미의 집에 들락이게 되는 것이 고양이를 건사해야 하는 것의 병치다. 소똥을 치면서 우스꽝스런 방식으로 동요를 고래고래 불러대서 관객의 웃음을 산다. 노래는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로 변조된다. 송아지가 된 복동이는, 엉덩이가 뜨거워지는 '버닝'이 암시되지만, 영화는 그걸 굳이 내세워 강조하지도 않는다. 송아지를 판다는 것은, ‘도살’의 의미였던가. 트럭에 올라탄 송아지의 슬프고 불안한 눈이 잊혀지지 않는 건, 송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종수로 치환되는 다연결의 메타포들 때문일지 모른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영화 '버닝'의 한 장면]



(5)비닐하우스의 메타포 게임

메타포는 실체와 잠정적인 것 사이의 긴장된 심문을 담는다. 비닐하우스는 관객을 끝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가장 노련한 게임이다. 종수가 꺼내온 대마초를 함께 핀 벤은 뜻밖의 이야기를 해준다. 자신은 두 달에 한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으며, 그것을 하고나면 어깨 아래의 심장 부근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주에 온 것도 태울만한 비닐하우스를 물색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미 찾았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종수는 이날 이후 해미가 사라졌을 때, 비닐하우스 태우기가 해미와 상관이 있다는 심증을 갖게 된다. 종수 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그런 심증을 굳힐 만한 방증(傍證)을 만난다. 벤의 집에서 발견한 해미의 시계와 고양이 ‘보일’. 그리고 연못을 찾아가는 벤. 게다가 벤은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요리를 하는 걸 좋아해요. 내가 의도한 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요리가 왜 살인과 그토록 착 달라붙는 말인지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지경이다.) 이 정도면 대개의 영화에선 ‘해미를 죽인 살인범(벤의 화장실 서랍속에 있는 여자의 장식물로 봐서는 연쇄살인범)’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벤이 태울 거라고 말한 비닐하우스는 동네 인근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종수가 헤매면 헤맬수록 그와 함께 심증은 굳어진다. 벤의 비닐하우스는 거짓말이 아니라, 단지 메타포였을 뿐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 게임이 영화를 음산하게 만든다. 온갖 상상력이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다. 비닐하우스는 바로 여자를 의미하며 그것을 불태우는 일은 ‘방화살인’이나 ‘살인방화’를 암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왜 비닐하우스인가. 비닐벽처럼 잠정적이며 허술한 존재라는 조롱이 담긴다. 사람은 자주 ‘집’으로 비유되어 왔다. 잘 지어진 집이 있는가 하면, 강제철거를 당한 용산의 낡은 집도 있다. 거기에 버려진 존재이며 차라리 처음처럼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는 존재라는, 해미의 중얼거림이 투사된다.

영화는 소설가이기도 한 이창동 감독답게 윌리엄 포크너의 ‘반 버닝(Barn Burning, 헛간태우기, 1939년)’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방화’에서 모티프를 계승했다. 영화 속에서 소설지망생 종수는 포크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포크너의 ‘불타는 헛간’은 불합리에 대항하는 항거의 표현물이며, 하루키의 헛간은 여성과 함께 사라지는 공간이다. 이런 스토리텔링의 연결은, 쉽게 우리의 감관을 금수저 범죄자 벤의 여성살해 사건으로 추론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창동은 이야기를 심증에서 한 걸음도 더 떼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둔 채 피네 자막을 올린다. 이런 방식은 벤의 범죄 여부보다 중요한 것이, 종수의 본질적인 분노라는 해석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 또한 구구한 짐작 중의 하나일 뿐이기는 하지만.

(6)소설과 판토마임의 게임

종수는 문창과를 다닌 소설 지망생이다. 영화 속에서도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는 장면 이후에 등장한, 종수의 살인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 속 문장들이 이뤄낸 장면이라는 풀이 또한 열려 있다. 종수는 아버지처럼 분노조절에 실패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스토리 속에 녹여내 표출한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가 자신의 모든 옷을 벗어 함께 불태우는 장면은, 문득 파주 노을 앞에서 대마초를 피운 뒤 실실 웃음을 풀며 춤을 추는 해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대우주의 ‘버닝’ 앞에서 옷을 벗으며 춤을 추는 여자와, 거대한 악의 버닝 앞에서 마치 육신의 껍질을 벗듯 옷을 벗는 남자는, 모두 거대한 굶주림(Great Hunger)을 향한 신성한 몸짓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은 이 영화를 통째로 심문한다. 무엇이 현실이며 무엇이 가짜인가. 종수가 해미를 만난 것은 사실인가. 혹은 해미가 아프리카를 다녀오고 벤을 만난 것은? 이 모두가 종수의 소설 속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니었던가. 굳이 종수의 소설이 아니었다 해도, 그것은 포크너나 하루키, 혹은 이창동의 스토리 속에서 만들어진 가짜현실이 아닌가. 우린 그 가짜에서 무슨 진실을 찾아내려는 것일까, 이런 메타적 심문 말이다.

해미의 판토마임은 미궁의 디테일을 늘려놓는다. 귤을 먹는 판토마임을 선보이며, 비밀을 말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돼.” 그녀는 실제로 귤을 먹는 것처럼 침샘을 움직이고 혀를 젖게 할 수 있다. 해미의 고양이는, 통째로 하나의 판토마임이다. 대인기피증이 있다는 단서 하나가 판토마임을 가능하게 한다. 해미의 후암동 원룸에 고양이 보일이 진짜 있었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그날 강남 벤의 집에서 만난 고양이가 ‘보일아’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반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걸 누가 입증해줄 수 있겠는가. 이창동 감독도 할 수(필요도) 없는 일이다.

벤의 비닐하우스도 하나의 판토마임이다.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굳이 갈피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혼란을 늘려놓는 셈이다.

가장 흥미로운 판토마임은 우물이다. 해미는 고향 집에 우물이 있었다고 했고 7살 때 그곳에 빠졌으며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그때 소녀를 구한 사람이 종수라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해미가 종수를 가장 의지하는 이유이며, 종수가 해미에 대해 강하게 부채의식을 느끼게 된 단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미의 가족(엄마와 언니)은 우물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고 해미가 우물에 빠진 사실이 없었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종수의 엄마는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누구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대목이지만, 버리고간 자식에게 궁한 모습을 보이며 손을 벌리는 듯한 종수 엄마의 말이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종수 엄마가 그렇게 맞장구를 쳐준 것이, 아들의 비위를 맞추려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우물이 없었다면, 종수와 해미가 서로 엮인 ‘간절한 인연’도 고스란히 해미의 창작물에 불과해진다. 이 문제 또한 끝까지 열려 있다. 해미의 판토마임 마인드컨트롤인 ‘없다는 것을 잊어버림’으로 만들어진 신기루일 가능성 50%.

7. 작은 굶주림과 큰 굶주림의 메타포 게임

아프리카 부족의 춤과 관련해 해미가 들려준 말이다. 그들은 두 개의 굶주림(Hunger)이 있다고 믿는데, 하나는 현실적인 배고픔인 리틀 헝거(Little Hunger)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배고픔인 그레이트 헝거라고 해. 인간은 대개 리틀 헝거를 지향하지만, 하늘과 소통하는 자는 그레이트 헝거를 느낀다는 것이다. 해미의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중대한 잣대로 기능하기도 한다.

후암동 원룸의 해미나 파주의 흙수저 종수는, 리틀 헝거가 당장 문제인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영성(靈性)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포크너를 읽으며 문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그레이트 헝거’의 소유자라는 역설. 반대로 강남의 벤같은 이는 리틀 헝거 따윈 이미 초월했을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위대한 굶주림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해미가 보여주는 ‘위대한 헝거’의 춤을 피상적으로 구경하며, 종수가 말한 포크너를 직접 사서 읽는 척을 하는 ‘노 헝거(No Hunger)'일지 모른다. 리틀 헝거의 변종인, 범죄 취미로 굶주림을 채우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위대한 헝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다만 게임의 한 종류일 뿐이다. 오히려 위대한 헝거는 ‘결핍의 현실’을 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일을 두려워 하는 자의 자기 방어논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위대한 헝거를 향한 해미의 춤은 충분히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영화의 맛을 뽑아내는 좋은 메뉴인 것 같다.

영화는 하나의 메타포를 통해 깨달음을 만들어내는 쪽보다, 하나의 비유로 귀착되지 않는 모호함으로 그대를 가지고 논다. 좀 심한가. 섣부른 짐작과 추론과 의심을 비웃으며 부정(否定)한다,로 바꾸자. 어쨌든 그대가 보지 못한 채 가려진 줄 뒤에 중대한 귀결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사다리타기는 아무도 그 줄끝을 확인하지 못하는 게 약간의 흠이라면 흠이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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