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덕구' 이순재 "내가 '최고'라는 망상 위험…자책하고 보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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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희 기자
입력 2018-04-0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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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덕구'에서 덕구할배 역을 열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연기 경력 62년. 배우 이순재(83)는 무대·브라운관·스크린 등 한국 문화계의 변화를 몸소 겪어왔다. 연예계 초기부터 과도기, 부흥기까지 거친 그가 여전히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연기 철학과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덕구’(감독 방은진)은 이순재의 고민과 도전이 오롯이 담겨진 작품이기도 하다. 어린 손자들과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되며, 세상에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는 이야기는 담백한 맛과 뭉근한 온도를 자랑한다.

이번 작품에서 이순재는 어린 손자들을 키우는 시골 할아버지 ‘덕구 할배’ 역을 맡았다. 언제나 새로운 얼굴을 창조해내는 그는 ‘덕구 할배’라는 인물을 통해 거칠한 민낯과 솔직한 면면을 그려내고자 했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배우 이순재와의 일문일답이다

영화 '덕구'에서 덕구할배 역을 열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영화 ‘덕구’에 노개런티로 출연한 것이 화제가 됐다
- 돈을 달라고 해봤자 주지도 않을 것 같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손익분기점이 넘으면 나중에라도 달라고 해볼까 생각 중이다. 하하하. 출연진이 나랑 애들 밖에 없지 않나.

주연배우로서 가지는 부담이 있을 것 같다
-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내가 주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따르지 않겠나.

오랜만에 주연작을 맡게 됐다
- ‘우리 나이에 주연 할만한 작품이 있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연극판에서는 꽤 있더라. 연극 하자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관객 층도 나름 두터워서 ‘이걸 제대로 모여서 한다면 손님도 있겠구나’ 싶었다.

최근 시니어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 우리는 구색 갖추는 거지. 하하하. 늙은이들은 이야깃거리가 많다. 우스갯소리로 ‘늙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트콤을 해보라’고 던지기도 했는데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저나 신구, 최불암 같은 조건에 맞는 사람을 세 명 정도 묶어서 세 명의 늙은이와 가족들을 보여주는 거지. 3대의 이야기를 꺼내면 재밌는 소재도 많을 것 같고. 제안만 해봤는데 받아주는 데는 한 군데도 없더라고. 하하하.

이제 연기 경력만 62년째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 영상자료원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찾아왔다. 그쪽에서 자료들을 추려서 보여줬는데 제가 찍은 영화만 100여 편이더라. ‘이렇게 많이?’ 나도 모르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더라. 하긴 1년에 7편에서 8편씩 막 찍었으니까. 동시에 4편을 같이 찍은 적도 있었다.

영화 '덕구'에서 덕구할배 역을 열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시는 것 같다. ‘덕구’만 해도 이전 작품들과 결이 완전히 다르지 않나
- 연기는 ‘창조성’이 중요하다. 작품보다 못하는 연기가 있고, 작품만큼만 하는 연기가 있고, 작품을 올려주는 연기가 있다. 대사만 잘 외운다고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연구하지 않으면 연기할 수 없다. 머리에서 아이디어가 나와야 한다. 톱스타 친구들을 보자면 인기가 톱이면 연기도 톱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이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언제나 똑같은 역할만 하려고 하고, 고정적인 연기만 하려고 하는 건 배우로서 경계해야하는 행동이다.

어떤 경계가 필요할까?
- 자질이나 백그라운드(배경)가 훌륭하더라도 ‘내가 최고다’라는 망상과 아집에 빠진다면 뻗어나가질 못한다. 연기는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의 연기, 행위에 대한 판단이 흐려진다면 발전할 수가 없다. 자기 것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 대사 몇 마디를 잊어버리면 남은 몰라도 나는 알지 않나. 자책하고 보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맨 술이나 먹지 말고.

1964년 서울에서 개국한 민영방송국 TBC 공채 1기다. 당시 많은 배우들이 연극판에서 브라운관으로 주무대를 옮겼는데
- 요즘 방송국은 천지개벽한 수준이다. 예전에는 배우들이 방송국과 직접 출연료를 거래 했다. 작품 하나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으니까 동시에 7~8편 계약하곤 했다. 저는 신혼 초일 때 한 달을 기준으로 본다면 집에서 자는 시간이 일주일 혹은 5일 정도였다. 20일을 뛰어다녀야했지.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니까. 요즘 배우들은 작품 1~2개 찍고 건물도 사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건물 하나 없다.

가장 달라진 건 역시 출연료 부분이겠다
- 그렇다. 현재 연예계는 과거와 상당 부분 다르다. 출연료 부분에서는 완전히 돌연변이가 됐다. 당시 우리는 방송국에서 월급을 받아왔는데 오래 활동하더라도 (출연료가 오르지 않고) 정체됐다. 그걸 트기 시작한 게 90년대다. 출연료가 몇 천만 원씩, 몇 억씩 되는 건 외주제작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체제작은 이런 돈이 나올 수 없거든. 옛날에는 CF도 돈이 안 됐었다. 수입이 없으니까 작품에만 매달리는 거지.

영화 '덕구'에서 덕구할배 역을 열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기도 하겠다
- 요즘은 연기파 배우들도 성공하는데 옛날엔 오로지 한 길이었다. 다만 우려되는 건, 돈을 적당히 벌어야 한다는 거다. 몇백 억씩 벌면 (연기가) 비즈니스가 되지 않겠나. 이미지가 좋은 작품만 하려고 한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 주연에서 조연으로 내려가고 주인공에서 삼촌·아버지 역할을 하는데 그걸 과연 받아들이겠냐는 거다. 연기에 정진해서 20대부터 비워나가며 발전해야한다고 본다. 돈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연기만 정진한다는 게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중간 중간 연기 외적인 유혹을 받지는 않았나?
- 나는 내가 비즈니스가 안 되는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안다. 60년대 작품이 없어서 3~4개월 동안 공백를 맞은 적이 있었다. 마누라가 만두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잘 되더라. ‘연기를 때려치고 같이 프랜차이즈를 하자’고 했는데 나는 죽어도 연기를 해야 할 사람이었다. 조금씩 벌더라도 내가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다. 연기를 하든, 사업을 하든 어떤 하나에 매진해야한다.

배우 선배로서 미투운동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향후 미투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나?
- 이제 정신 차리지 않겠나. 다시 그런 짓 하겠어? 옛날 40~50년대에는 관행으로 보기도 했었다. ‘귀여워서 그랬다’는 말로 무마했었지. 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선후배는 상하관계, 종속적 관계가 아니다. 대등한 관계인 거다. 후배가 연기를 배우러 왔지 시종 들러 왔겠나. 선배는 선배로서의 역할이 있다. 이게 오래 군림하다 보니 (성적 추행이) 관행이 되고 습관화가 돼 이런 결과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이런 걸 걸러줘야 할 사회적 이슈가 생긴 거다. 상대방의 의견 존중하고 제대로 된 사회조직이 되어야 한다. 미국서 건너온 미투운동이지만 우리 사회정화의 좋은 전기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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