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⑪] 등장인물:성엄 김의한, 스무살에 독립운동 투신… 평생 백범 김구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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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0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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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 김가진의 장남이자 수당 정정화의 남편

[남북협상 당시 평양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들과 함께 한 성엄 김의한(왼쪽끝), 성엄 오른쪽으로 조소앙, 최석봉, 신창균.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성엄 김의한은 동농 김가진의 장남이자, 수당 정정화의 남편이다. 약관의 나이로 동농이 총재로 추대된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고, 1919년 10월 부친을 모시고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 생활 초기에는 부친을 수발을 들며, 교포 청년들과 우의를 다지는 한편, 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 무장투쟁을 지지해 일가친척인 김좌진 장군의 권유로 만주의 독립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다니며, 중국북부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 상해지부 조직에 참여하고, 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백범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 한인애국단의 창단멤버이며, 윤봉길 의사의 거사(1932.4.29.) 직후 백범을 보좌해 임시정부 이전(자싱, 항저우)을 도왔다. 백범과 장제스의 면담(1933.5)으로 설치된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등에 관여하며 항일 군사조직 건설에 힘썼다.
1934년 봄, 중국인으로 신분을 감추고 중국정부 관리가 되어 5년간 일했다. 이 기간이 수당 부부에게는 26년에 걸친 중국 망명생활 중에서 그나마 안정된 시기였다. 중일전쟁(1937. 7)이 발발하자, 5천킬로미터가 넘는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를 지키며, 비서처 비서, 선전위원 등을 맡았고, 전시수도 충칭에서 동포들에게 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선무방송을 책임졌다. 광복군(1940.9.17.) 총사령부 주계(主計), 조직훈련과장, 정훈처 선전과장으로 일했다.
한국국민당(1935.11) 발기인, 통합 한국독립당(1940.5) 감찰위원 및 조직부 주임으로, 백범의 정치노선을 뒷받침했으며, 1946년 5월 귀국해 백범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남북협상(1948.4)에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했고,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유해는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묻혔으며,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아내 수당 정정화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북한 정부는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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