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7] 티베트 불교는 얼마나 탄압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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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4-0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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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종교탄압 피신 동굴

[사진 = 테렐지 근처 바위동굴]

울란바토르 근교의 휴양지 테렐지를 가다보면 길옆에 그리 크지 않은 바위산이 눈에 들어온다. 암벽 등반을 하듯 어렵게 그 바위산을 타고 올라가 보면 바위 틈새로 50평가량의 널찍한 공간이 열려 있다. 바위 동굴이었다.

이 동굴은 1,930년대 말 티베트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 몰아 닥쳤을 때 라마승들이 숙청의 칼바람을 피해 숨어 지내던 곳이다. 입구 쪽은 그래도 빛이 들어와 괜찮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천장이 낮아 안으로 들어가던 필자도 두 번이나 머리를 부딪쳤다.

어두운 곳에 앉아 입구 쪽을 바라보니 새파란 하늘만 길쭉하게 열려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져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이 캄캄하고 음습한 곳에 숨어 지내던 라마승들의 당시 심정은 어땠을까?
 

[사진 = 에르데니 주 승려]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이 속에서 숨어 지냈으며 또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혹독한 종교의 탄압 속에서 그들은 동굴의 어둠처럼 암담한 심정으로 작게 열린 하늘만 바라보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티베트 불교 대대적 탄압

[사진 = 초원의 티베트 불교 사원]

1,928년부터 몽골 좌파는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티베트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몽골 좌파의 이러한 행동은 좌우파 간에 치열한 논쟁 끝에 나온 것이었다.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우파들은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주장은 러시아의 특수상황일 뿐”이라며 티베트 불교 보호에 나섰다.
 

[사진 = 티베트 불교 승려]

하지만 라마승이 사람들의 마음을 중독 시키고 인민을 잔인하게 착취한다는 좌파의 선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우파들은 자신들까지 숙청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대대적인 승려에 대한 체포와 불교 재산의 몰수조치가 단행됐다. 이 같은 조치는 앞서 언급한대로 유목 집단화와 함께 시행돼 무력저항까지 불러오면서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긴든 시대, 불교탄압 잠시 주춤
그래서 1,932년 이후 투옥됐던 라마승들이 석방되고 사원경제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더욱이 불교에 우호적인 긴든이 당비서와 수상직을 맡으면서 잠시 숨을 돌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뿐이었다.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던 긴든은 티베트 불교는 당과 국가보다 대중에게 더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특별한 방식으로 다뤄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몽골에는 두 개의 권력이 존재하는 데 긴든의 권력은 약하고 라마승의 권력은 강하다”고 비꼬며 긴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질책했다. 인민혁명 후 10년이 지나도록 몽골에서 소비에트식 사회주의가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불교 탓이라는 스탈린의 인식은 또 한 차례의 피의 숙청을 예고하고 있었다.

▶‘몽골의 스탈린’ 초이발산
당장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좌파들이 나서면서 긴든은 실각했다.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초이발산이었다. 그의 별명은 ‘몽골의 스탈린’이었다. 그가 어떤 형식으로 사회주의 급진 개혁을 밀어 붙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별명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티베트 불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재개됐다.

일본의 첩자와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것이 내세운 명분이었지만 좌파 중심의 권력을 안착시키려는 정치적 세력의 재편 작업이었다. 라마승들이 대거 체포돼 처형된 것은 물론 우파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숙청됐다. 불교 조직의 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사진 = 몽골 오보의 하닥]

1,921년 당시 747개가 있었던 사원 가운데 7백 개 이상이 이 때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만 7천 명의 라마승이 처형당했다는 것이 몽골의 원로 다시 바타르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부 자료는 당시 처형된 라마승과 신자는 3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괴된 사원과 불타는 경전만큼이나 몽골인의 정신문화를 황폐화시킨 이 조치는 몽골 역사에 남은 비극적인 검은 발자국이라고 몽골 학자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만추쉬르의 폐허된 사원

[사진 = 울란바토르 간단사]

울란바타르 서쪽에 있는 만추쉬르 사원은 할하가 청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갔던 1,733년에 세워진 사원이다. 1,930년대 말 티베트 불교 탄압의 흔적은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파괴된 뒤 잔해만 남은 사원의 벽과 폐허가 된 자리 사이사이로 머리를 내민 잡초들만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20여 개의 사원이 들어서 있고 4백여 명의 승려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면서 티베트 불교를 융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던 이 사원은 1930년 말 초이발산이 주도하는 불교 대청소작업에 쓸려 나간 것이다.
 

[사진 = 만추쉬르 사원의 불상]

몽골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이 사원에 일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복구 작업이 진행됐지만 사원 측은 사회주의 시절 혹독한 탄압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무너진 사원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 뒀다. 사원 관리자는 만추쉬르 사원은 18세기 초 이 자리에서 노인 모양의 흰 돌이 발견되면서 이를 좋은 징조로 여기고 사원을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진 = 바위에 새긴 불상]

후레의 외곽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춘 곳에 사원이 지어지면서 이곳은 여름이면 청나라 최고 관리들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넓은 사찰의 터가 군데군데 다듬어져 이제는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되고 있지만 황량한 들판과 박물관 그리고 무너진 건물 모습에서 이 사원이 겪은 고난의 세월을 읽을 수가 있다.

▶탄압 덜 받은 샤먼

[사진 = 몽골의 샤먼]

초이발산의 종교탄압은 스탈린의 무신론을 바탕에 깔고 추진됐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 비해 샤먼들은 탄압을 덜 받았다. 샤먼 가운데 처형당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샤먼들이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기서도 티베트 불교에 대한 탄압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몽골 사회주의 체제는 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1,960년대 들어 형식적으로나마 조금씩 티베트 불교에 대한 숨통을 틔워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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