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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3] 淸 지배 아래 어떻게 살았나? ①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8-03-15 08:03수정 : 2018-03-15 08:0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160-270년에 이르는 청 지배

[사진 = 청나라 관리의 몽골인 고문(몽골 국립박물관)]

몽골인들은 얼마동안 청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는가? 몽골지역이 청나라의 통치 아래서 살았던 예속의 세월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내몽골 지역은 270여 년의 세월도 모자라 아예 중국 속으로 편입돼 지금도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준가르 지역은 160여 년을 청나라 통치 아래서 지냈다.

그 후에도 중국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 대부분 지역이 그 속에 들어가 있다. 흔히 외몽골이라 부르는 몽골고원의 할하지역은 220여 년 동안 청나라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 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지내는 등 시련의 시기를 더 겪은 뒤 지금의 몽골에 이르고 있다. 통상 청나라의 몽골 통치는 할하 몽골이 그 아래서 지냈던 220년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사진 = 나무 형틀]

이 시기 동안 한 때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고 여러 민족을 지배했던 몽골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입장으로 역전 됐다. 그런 만큼 몽골인들도 지배국에 의해 통제되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타율적인 통제는 통상 고유의 기질과 특성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가난과 고통을 불러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몽골인이 겪은 예속의 세월도 이와 비슷했다.

▶제한된 지역에서 이동
이동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유목민들! 그들에게서 어디든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아버린다면 그들을 완전한 유목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금 몽골 초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몽골인들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이동을 하면서 가축을 키울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슈본씨 가족과 취재진]

고비지역 솜베르 아이막에서 만났던 유목민 슈본씨는 행정관서의 허락 없이는 다른 아이막으로 옮겨 다니며 유목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몇 마리의 가축을 끌고, 몇 명이 얼마동안, 어느 지역에서 머물겠다고 신고를 하고 그에 대한 허락이 떨어져야 비로소 이동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목민들은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기 위해 정해진 구역 안에서 계절 따라 비교적 짧은 거리를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제한-청나라 지배의 유산

[사진 = 초원의 양떼]

유목민의 자유로운 이동의 제한! 그 것은 바로 2백년 이상에 걸친 청나라 지배의 유산이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몽골의 옆에서 살면서 몽골인의 습성을 가장 잘 이해했던 반(半)유목민들이었다. 때문에 유목 기질을 잘 알고 있는 만주족의 유목민 통제는 그만큼 철저하고 효과적일 수밖에 없었다.

몽골 사회과학 연구소의 촐몬교수는 만주족은 유목민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몽골인을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몽골인의 힘이 모이지 않고 분산 시키도록 하기 위한 방편을 구사했다고 설명했다. 유목민의 이동을 행정 단위별로 제한함으로써 그들의 힘이 결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청나라가 실시한 것이 바로 맹기제(盟旗制)다.

▶맹기제(盟旗制)로 통제 강화
이것을 잠시 설명해보자. 청나라 통치 아래 있던 몽골 사회구조의 기본 단위는 호쇼(旗)였다. 독립성이 높은 이 호쇼를 다스리는 몽골의 영주가 자삭이다. 청나라는 할하를 지배하기 전에도 8명의 자삭을 지명했던 적이 있다고 소개했었다. 호쇼의 아래는 솜(蘇木)이 있고 호쇼의 위에는 촐간(盟)이 있다. 솜은 통상 150호(戶)로 구성이 됐다.
 

[사진 = 몽골인의 말 거래]

그러니까 아래로부터 보면 솜-호쇼-촐간 형식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호쇼를 뛰어넘는 안건은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집회인 회맹(會盟)을 통해 처리 됐다. 솜이라는 행정 단위는 아직도 몽골에 남아 있고 호쇼, 즉 기(旗)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은 내몽골 지역에서 몇 곳이나 만날 수 있었다. 각 촐간에 속한 자삭들 가운데 청나라가 그 우두머리를 지명했는데 그 것이 잔징(盟長)이다.
 

[표 = 맹기제]

▶내부 변혁 가능성 차단

[사진 = 나무감옥 자물쇠]

청나라는 할하 지역에 있던 과거 8개의 호쇼를 86개로 늘렸다. 그리고 각 호쇼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속에 있는 유목민의 유목 범위를 정해 주었다. 또한 병정 수를 제한하고 호쇼 영주들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했다. 여기에 호쇼 단위로 세금을 징수하고 군인을 징집했다.

청나라는 중앙에 이번원(理藩院)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각 촐간(盟)의 행정을 통괄하게 했다. 이와 함께 각 지역에는 장군(將軍), 도통(都統), 대신(大臣) 등의 상급 기관을 두었다. 여기에 중앙에서 파견한 만주인이나 몽골 팔기 출신의 관료를 두어 맹기(盟旗)를 감시하게 만들었다. 몽골을 관습법을 바탕으로 한 몽골율서(蒙古律書)도 반포됐다.

또한 몽골의 영주들이 정기적으로 북경을 방문하도록 하는 연반(年班)제도도 실시했다. 이처럼 철저한 통제아래 유목민 사회를 호쇼(旗)를 기본단위로 분리시키고 고정화시켰으니 내부로부터 변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체념 속에서 택한 순종의 길
청나라는 황제와 몽골영주는 주종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황제가 칭기스칸 가계의 옥새를 가졌으니 몽골의 대칸이라는 점을 내세워 지배의 정통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처럼 허구화된 정통성을 내세워 몽골의 영주들이 지배권 밖으로 이탈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고 맹기제를 통해 서로간의 연계를 막았다.
 

[사진 = 몽골의 가축]

그 결과 유목민과 가축들의 발이 제한적으로 묶이게 됐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유목민들은 마음대로 지역을 옮겨 다닐 수 없게 됐다. 목초지가 부족해도 일정한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과거 목초지를 둘러싼 부족 간의 불화와 충돌을 줄이는 효과는 가져왔다.
 

[사진 = 울란바토르 근교 게르]

하지만 이동의 통제는 가축부족과 생산력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가난을 의미했다. 유목민들에게 의식주 해결이 최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순종과 반발 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철저한 통제 시스템에 옥죄인 거의 모든 유목민들은 체념 속에서 순종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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