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본연本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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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1-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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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영혼(靈魂)
35세의 한 인간이 있다.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서 태어난 그는 35세가 되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다. 그가 즐겨 읽는 성서가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잡았는데, 이에 따른다면 인생의 반을 산 셈이다. 반생(半生)을 산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사람은 ‘신곡’(La Divina Comedia)의 저자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다.

피렌체를 다스리는 정치가를 꿈꿨던 단테는 피렌체 정치가 소용돌이치면서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다. 그는 죽는 날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방랑자 신세로 전락한다. 그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몰입해야 하는 한 가지를 발견한다. 자신을 찾기 위한 글쓰기다.
 
단테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20살 때 ‘신생’(Vita Nuova)이란 파격적인 스타일의 시집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가슴속 깊이 숨어 있었으나 이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생생하게 고백한다. 이는 같은 동네에 사는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라는 소녀에 대한 감정이지만,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 자신만의 매력이다. 그는 이 감정이 약동하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저는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사랑으로 넘치는 영혼’(Un spirito amoroso)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그 영혼을 두 눈으로 봅니다. 저는 너무 기쁩니다. 저는 이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신생’ 24권 1~4행). 그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정치가의 꿈을 버리고, 자신을 진정으로 다스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발견하는 장소는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부의 장소가 아니다. 바로 자신의 마음속이다.
 
자신의 심연에서 발견한 것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독창적이다. 독창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감동적이다. 인생의 우여곡절의 순간 그는 자신에게 몰입해 자신도 몰랐던 ‘사랑이란 영혼’을 발견한다. 그는 이 영혼을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서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여정은 완벽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수련과정이다. 그것이 바로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이어지는 100편의 시 ‘신곡’이다.

단테는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 방언을 이용해 서술했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민족을 창제했다. 그 정신이 르네상스의 불씨가 됐다.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발견해 노래하는 자가 ‘시인’(詩人)이며, 발휘하는 자가 ‘천재’(天才)다. 우리는 이것을 ‘본연’(本然)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본연을 수련하는 자는 곁눈질하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그는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흉내내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자신의 본연을 살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찰자 ‘드라스트르’(Draṣṭṛ)
‘요가수트라’ I장2절은 ‘요가는 마음속에서 항상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소멸시키는 것이다’라고 정의한 후, ‘소멸’의 내용을 ‘요가수트라’ I.3~4에서 부연 설명한다. 그는 요가의 목적을 단테가 말하는, 자신의 심연에서 잠자고 있던 ‘사랑으로 넘치는 영혼’과 같은 본연의 모습으로 정의한다. 고대 인도에서 ‘본연’을 이르던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힌두철학에서 ‘아트만’(ātman)이란 용어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다. 아트만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 초월적인 자아로 풀어서 번역됐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자아와는 달리 불변하고 내밀한, 초월적인 자기 본연의 자신은 ‘진아’(眞我)를 의미한다. 인도 요가 전통에서는 ‘푸루샤’(puruṣa)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푸루샤는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에서는 우주가 탄생하기 위한 원자재였다. 그러나 요가사상의 기반을 다진 상키아철학은 물질세계인 ‘프라크리티’와는 다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세계인 푸루샤란 개념을 생성시킨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적인 자신의 모습인 ‘신아’(神我)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에서 요가의 목적의 본연이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트만이나 푸루샤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드라스트르’(Draṣṭṛ)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보다, 배우다, 이해하다’란 동사 ‘드르스’(dṛś)에서 파생된 단어로, ‘심오한 통찰력으로 보는 사람, 객관적인 관찰자, 심오한 관찰’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보는 행위’는 신체기관인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파탄잘리는 드라스트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객관적인 관찰’ 혹은 ‘객관적인 관찰자’란 그 대상이 각별하다. 객관적 관찰의 대상은 외부가 아닌,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본연의 자기모습’이다. 또한 자신의 ‘본연’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수련과정, 그것 자체가 목적이다.
 
본연(本然)
‘객관적인 관찰’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본연의 모습’에 조용히 안주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일상의 경험이자 수련이다. 파탄잘리는 ‘본연’을 ‘스바루파’(svarūpa)란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스바루파는 ‘자기 자신(스바)이 취해야 할 자기고유의 아름다움(루파)’ 혹은 ‘자기 자신이라는 자신만의 개성’이다. 그리고 ‘본연’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려는 수련을 ‘조용히 안주한다’라는 의미인 ‘아바스타나’(avasthāna)로 설명한다. 아바스타나란 ‘자신의 본연이 존재하는 심연으로 내려가(아바), 그곳에 거주하고 자신으로 우뚝 서려는(스타나) 수련’이다. 요가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발견해 고유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의연한 수련이다.
 

도미니코 페타르리니, '추방된 단테 알리기에리'(1860), 피렌체 베키오 궁전 소장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에이데이'(Eidei)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작 ‘국가’에서 인간이 회복해야 할 본연의 모습을 그리스어 ‘에이데이’(Eidei)로 설명한다. 영어 단어 ‘아이디어’(idea)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데아’는 ‘보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이데인’(idein)에서 파생했다. 파탄잘리나 플라톤 모두 연의 모습을 ‘보는 행위’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이데아’는 우리가 일상에서 오감으로 ‘관찰’한 것들이 아니라, 가시적이며 감각적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래의 모습이다. 물질은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의견’일 뿐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교육과 교육의 부재가 인간 본성에 미치는 영향’을 세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태양의 비유’, ‘분선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동굴의 비유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과의 대화 중 등장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포로들이 동굴 깊숙이 목이 고정된 채 동굴 안 벽만 보도록 묶여 있다. 이 사람들 뒤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다. 사람들이 모닥불과 포로들 사이에서 물건을 가지고 돌아다닌다. 포로들은 사람들이나 물건들을 직접 보지 못하고 동굴벽에 드러나는 그림자만 본다.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는 동굴 안에서 울려, 그림자들이 알 수 없는 소리로 웅성거리는 것으로 판단한다. 불이 반영돼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포로들에겐 현실이다. 그림자 본연의 모습인 사람이나 물건 혹은 이것들을 왜곡시키는 불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이비(似而非)
‘요가수트라’는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불처럼 인간의 시야를 왜곡하는 방해꾼이 바로 ‘브리티’, 즉 ‘소용돌이’라고 말한다. 호수 표면에서 끝없이 출렁이는 ‘물결’이나 ‘소용돌이’는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인 ‘드라스트르’의 관찰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킨다.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 소용돌이를 소멸시켜야 한다. 인간이 소용돌이를 소멸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사이비’(似而非)다. 파탄잘리는 이것을 ‘사루프야’(sārūpya)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사이비’의 축자적인 의미는 ‘유사하나 같지 않은 것’이다. 사이비는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사람의 별칭이다. 그는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서도 자신의 배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 말, 행위를 장악하는 고유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은 핑계이며, 그의 행위는 흉내다.
 
파탄잘리는 인간이 수련해야 할 ‘본연’을 ‘요가 수트라’ I.3~4에서 소개한다: “(3)타다 드라스투 스바루페-바스타남(tadā draṣṭuḥ svarūpe-'vasthānam) (4)브르티 사루프얌-이타라트라(vr̥tti sārūpyam-itaratra).” 이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3)요가의 목적인 소용돌이 소멸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련하는 자는 스스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그것에 안주해야 한다. (4)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인생이라는 소용돌이가 나를 사이비로 만들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매 순간 추구해야 할 나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였는가? 그것을 내 삶속에서 완성하기 위해 지금 수련하고 있는가? 나는 ‘사이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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