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변화(變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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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12-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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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오늘 아침, 나는 나에게 가만히 묻는다. 나는 내가 열망하는 나를 가지고 있는가? 그런 나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모양과 본질을 나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통해 구체화하기 위해 내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관찰하고 장악하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런 의식적인 표현과정이 훈련이다. 인간이 각자에게 맞는 훈련 프로그램이 없다면, 그는 과거에 안주하는 유물이며,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노예다.

현대대중사회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현대’라는 개념을 지닌 사회를 구축한다. 많은 인구가 자신들이 거주하던 조그만 마을이나 시골을 떠나 직업과 기회를 얻기 위해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소위 말하는 대중과 대중사회의 등장이다. 대중사회는 직업의 분화와 심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물질적 이윤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여긴다. 30만년 동안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살던 인간이, 대중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계량화된 인간은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초초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작지만 강력한 인생의 목표는 상실되고, 물질적인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대중사회에서 개인의 불안은 심화된다. 이 불안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세계관의 등장으로 가속화됐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순응과 동일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창의성이나 유일함은 통계적인 평균에 의해 질식되고,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점점 고도의 과학적이며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태크노크랫이 된다. 인간은 추상적인 숫자에 불과하며 동질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관리되고 조정돼야 한다.

푸루샤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표상을 ‘푸루샤(purusha)'라고 불렀다. 푸루샤는 현재의 자신 혹은 변화과정의 자신과는 상관없는 추상적인 우주의 원칙이나 개념이 아니다. 한 사회를 성숙하게 만드는 기반인 ‘정의로운 사회’는 추상적인 모토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정의로운 사람이다. 푸루샤는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감동적이며 엄격한 훈련을 통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 ‘내면의 빛’이다. 이 빛은 미궁같이 복잡한 인간의 마음의 지도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푸루샤를 발견하고 발동시키기 위해서 오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내면의 빛을 발견하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운동을 ‘요가’라고 불렀다. 원래 요가(Yoga)는 고대 인도로 이주해온 아리안들이 전쟁에 사용할 말을 훈련하기 위한 도구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려는 야생말들을 잡아 훈련시킨다. 아리아인들은 전투에서 살아남고 마부의 인도에 절대복종하는 말로 만들기 위해 말의 목에 ‘멍에’를 채웠다. ‘멍에’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요크(yoke)'는 산스크리트어 요가에서 유래했다.

요가수련자
요가수련자는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이다. 자신이 흠모하는 원대한 자신을 자신이 존재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그 최적의 자신을 창출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중인 사람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요가 수련 중’인 인간이며 다른 부류는 현재의 자신에 안주하고 방치하는 인간이다. 요가수련자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다. 항상 변화한다. 그는 매일 ‘훈련 중’이다. 그런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은 더 나은 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매일 조금씩 전진하기 때문에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다. 변화무쌍한 인간만이 매력이 있다.

요가수련자는 매일 자신의 장점인 푸루샤를 찾아 훈련하고, 그것을 부각시킨다. 푸루샤를 가리려는 욕심을 과감히 유기한다. 아니, 자기중심적인, 현재의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이 싫어진다. 요가수련은 원대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자신의 나쁜 습관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고 연습해 본 적이 없는 인생 마라톤을 훈련 없이 참가하는 행위는 어리석다. 그는 그 마라톤을 완주할 의지가 없거나 자신이 목표점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일 뿐이다.
 

'엘 부루스 산' (니콜라이 야로셍코, 유화, 1894, 90.5 cm x 134 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소장)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판타 레이’
서양에서 오랫동안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위적으로 둘로 나누어 분석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소아시아 밀레토스 철학자들은 세계를 내부와 외부, 나와 너, 위와 아래로 구분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신과 인간, 천국과 지옥, 남자와 여자, 정신과 육체, 겉과 속, 생각과 행동 등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불완전한 개념들이다. 기원전 6세기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을 주장했다. 그 사상은 “판타 레이(πάντα ῥεῖ)”라는 고대 그리스 문장으로 표현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모든 것이 흘러간다”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주라는 수레바퀴를 돌리는 ‘시간’이라는 괴물을 통해 변화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무한한 반복이 우주의 문법이다. 플라톤은 이 문장을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두 제자인 크라틸루스와 헤르모게네스와 ‘언어’의 본질에 관한 대화인 '크라틸루스' 402a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헤라클리투스는 어디에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강물의 흐름과 같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은 같은 강을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 우주는 강물과 같아서 항상 바다 쪽으로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바다에 도달해서는 태양빛을 받아 수증기로 승화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강물과 같아 항상 변하고 있으며, 우주라는 강물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그 변화의 순간만을 경험할 뿐이다.

‘로고스’와 ‘다바르’
우리는 세계를 서로 대립되는 항들을 통해 이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경전이나 신화는 이원론에 기초한 대립되는 항들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우주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상 구분이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며 생각과 행동은 동일하다.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행위는 억지이며 부자연스러워 부작용을 양산한다. 신체의 단련은 정신 훈련을 통해 극대화되고 정신훈련은 육체의 단련을 통해 유지된다. 정신의 표현이 육체이며, 생각의 자연스런 결과가 행동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가 대립적이며 서로 이어지지 않고,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惡)이며 거짓이다. 고대 그리스 단어 '로고스(λόγος)’는 인간의 이성이자,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에너지다. ‘로고스’를 통해 우주가 만들어지고, 우주는 로고스를 통해 유지된다. 고대 히브리 단어 ‘다바르(dabar)'는 ‘말’이면서 동시에 ‘행동, 사건’이란 의미를 지닌다. 말이 곧 사건이고 사건은 말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자신의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러기위해 인간은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말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요가 훈련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장악하고, 그 생각으로 정신과 영혼을 절제하는 운동이다.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침묵이 만들어낸 말을 사건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독립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에서 연관적이며 상대적인 인간으로 변한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을 승화해 신적인 속성을 발현시킨다. 훈련을 통해 매일 매일 변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자신에 자신을 감금시켜놓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요가는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진 거문고인 심금을 울리는 작업이다. 심금을 통해 인간은 신명나게 자신다운 삶을 춤출 수 있다. 심금을 찾기 위해 들어 나는 길목엔 수많은 편견들, 잘못된 가정들, 그리고 공포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거대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제도를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런 제도나 정책은 국민들을 늪지대로 인도하여 더욱 헤매게 만든다.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문지방, 거문고, 그리고 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을 고양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가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가 아니라, 개인의 손, 발, 몸, 정신, 그리고 영혼을 통해 서서히 개간된다. 만일 사회가 잘못 돌아간다면 그것은 개인이 홀로 서지 못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이념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요가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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