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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오십잡설 - '싸가지는 없다'

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입력 : 2017-12-08 06:00수정 : 2018-01-25 09:07

[사진=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나이가 '꺾어진 백 살'에 들어선 지 오래다. 예전 같으면 긴 수염 날리며 ‘에헴~’을 연발하는 원로 어르신급이다. 그때는 사람 나이 오십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살아온 관록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그러나 화장술, 성형술이 발달한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십 넘어도 나이 들었다는 실감도 없고, 나잇값 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오십 넘으면 사람이 이전과는 좀 달라질 것으로, 중후장대해질 것으로 생각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 듯 본질은 그대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것이다. 다만, 산전·수전·공중전 치르면서 노련(老鍊)을 넘어 노회(老獪)해지는 것까지 부정하기는 어렵겠다.

TV드라마에 빠져 훌쩍이는 아내를 아직은 이해할 수 없다. 그거 다 작가가 지어낸 가짜 이야기 아니던가. 작가가 시청자를 쥐락펴락하는데 거기에 놀아나니 한심할 뿐이다. 뉴스도 별 흥미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것 다 거기서 거기고 정치인들 하는 짓도 늘 마찬가지로 한심하다. 일찌감치 아내 따로 나 따로 TV가 두 대, 가족들 각자 방에 틀어박히면 혼자 거실에 뒹굴며 백 개의 채널을 순방하지만 가는 곳마다 심드렁하다.

그나마 요새는 홀로 산 속이나 무인도에 칩거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어 시간 때우는 데 그만이다. 세상만사 어깨의 짐들 훌훌 벗어던지고 나 홀로 도인처럼 살아가는 ‘자연인’으로부터 대리만족이나 하는 것인데, 출연인마다의 기구했던 젊은 시절과 ‘산 속 먹방’ 프레임에 그것도 벌써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이게 사는 건가 싶게 세월만 흐른다.

술만 먹기 위한 모임, 약속이라면 365일이 부족하다. 오십 넘으면 ‘그저 친구가 좋아, 사람이 좋아’라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어느 모임에 나가 누구와 만나는 것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이익이 될지 주판알을 더 튕긴다. 누구를 미워하고, 어떤 일에 분노하는 빈도는 줄고 ‘허허허’ 웃으며 ‘호박 같은 세상 둥글게 사는 것이지’ 하는 빈도는 늘 줄 알았는데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 다시는 안 본다’며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지우는 일이 다반사, 어찌된 일인지 예전보다 사람이 더 째째하고 소심덩어리로 변한다.

‘나이 들면 쌓아둔 돈이 내 돈이 아니라, 쓰는 돈이 내 돈’이란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그러나 그 호기로 저지른 만용의 지출은 어김없는 후회와 ‘술 끊겠다’란 부도수표로 돌아온다. 나이 들수록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옷 잘 입고 다녀야 한다는 것도 체험으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막상 아침이면 깨끗한 새 옷과 신발은 나중을 위해 고이 모셔두고 오래돼 낡은 순서로 먼저 꺼낸다. 빨리 더 입고 버린 후 새 옷 입을 거란 옛 관념에 갇혀 헌 옷부터 입으니 가는 곳마다 ‘꼰대’ 소리나 듣는 것이다.

오십은 세상을 관조하기에도 아직은 역부족의 나이인가 보다. 거창하게 ‘물은 바위를 만나면 옆으로 돌아, 앞으로 나아가 바다에 이른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삶의 지표로 내걸어 보지만 실제의 삶은 물이 아닌 바위다. 내가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알았던 것, 믿었던 것들만을 우직하게 꿰차고서 제자리에 굳건히 박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라는 것을 나만 모른다. 말로는 ‘이젠 운명이 굴리는 대로 살자’고 하면서도 속은 ‘운명아, 길을 비켜라. 내가 간다’는 속절없는 탐욕을 내려놓지 못한다.

다만, 이리 살다 보니 그래도 오십에 들어서야 배우고 깨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재산’이란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진리임을 실감하는 것이 딱 그렇다. 한참 젊었을 때는 ‘내가 이리 잘났으면 그만이지’라 거들먹거렸다. 오십 넘으니 그새 사람에게 공들이지 않았던 ‘독불장군’의 낭패와 구차함을 밥 먹듯이 목도한다. 사람에게 베풀고 공들였던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 구원 받는 경사도 다반사로 본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독불장군, 공짜, 비밀, 돈 잃고 속 좋은 사람’ 4가지는 절대 없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니 그래그래, 나는 길고 먼 인생길에 ‘싸가지는 없다’는 것을 더더욱 유념하리.

오늘부터 다시, 욱하며 휴대폰 번호 삭제하는 일부터 자제하리라. 누가 뭐래도 세상은 사람이 먼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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