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5] 원나라는 중국 왕조 계승국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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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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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원천적 정신세계는 몽골에 바탕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쿠빌라이가 몽골의 초원을 제쳐두고 중국 땅을 본거지로 삼아 그의 꿈을 펼쳤다. 일부 몽골학자들은 이는 쿠빌라이가 어린 시절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라나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동방으로 기울어진 통치를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쿠빌라이가 몽골의 다른 누구보다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사진 = 몽골의 오보]

이러한 쿠빌라이의 행동을 두고 국수주의적인 입장에서 좋지 않게 평가하는 몽골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30년 이상의 제위기간동안 비록 중국 땅을 근거지로 삼았지만 그는 일관성 있게 몽골이 가진 원천적인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이념을 실천해왔다. 국호를 위대한 텡그리의 나라, 즉 대원(大元)으로 삼은 것이 가장 드러난 증거다.

▶ 국호 대원(大元)으로 정해
쿠빌라이는 동생 아릭부케와 제위 계승전쟁을 시작한 1260년, 중통(中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는 잘 알려진 대로 아시아 지역 군주국가, 특히 주로 중국에서 사용하던 군주의 재위기간을 나타내는 기년법(紀年法)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고구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이 연호가 나타나지만 아무래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진 = 북경 거리의 중국인]

쿠빌라이는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면서 혈통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쿠데타로 일어선 정권의 정통성을 강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릭부케를 제압한 후 쿠빌라이는 연호를 지원(至元)으로 바꾸고 30년간 이 연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지원 8년인 1271년에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칭했다.

▶ 위대한 텡그리의 나라 大元

[사진 = 고비사막과 텡그리(하늘)]

지원이라는 연호나 대원이라는 국호는 변화하는 천지만물의 자연현상 원리를 설명하고 풀이한 역경(易經)에 있는 건원(乾元)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대재건원 만물질시(大哉乾元 萬物質始)는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건원은 하늘, 천도(天道), 천리(天理)를 말한다.

그래서 대원이라는 말을 ‘큰 하늘’, 몽골말로 하면 ‘예케 텡그리’가 된다. 텡그리 즉 하늘은 몽골인들에게 최상의 숭배 대상인 신이다. 그러니까 대원은 텡그리의 나라라는 의미의 중국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것도 그냥 텡그리가 아니라 예케 텡그리다. 즉 위대한 텡그리의 나라가 바로 대원제국인 것이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장악한 나라를 스스로 ‘위대한 하늘의 나라’라고 칭하고 그 중심지로 건설하게 되는 대도는 ‘위대한 하늘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중국 하늘과 텡그리의 차이

[사진 = 이동식 오르도]

중국에서도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하늘의 아들로 보고 천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에서 말하는 하늘과 몽골의 텡그리의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천자의 하늘은 하늘 아래 하계(下界), 즉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몽골인이 사용하는 텡그리는 절대 지배자로서의 하늘을 가리킨다. 몽골인들에게 텡그리는 인간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통찰하는 신성한 존재인 동시에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쁜 것을 가리는 심판자다.

몽골인들은 이 텡그리의 뜻을 무시하거나 텡그리의 보호를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어떤 것에도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칭기스칸도 텡그리에게만은 경외심을 갖고 대했다. 생의 고비마다, 또 전쟁에 나설 때 등 전환기마다, 칭기스칸은 텡그리에게 기원하고 그 뜻을 받들었다. 쿠빌라이의 국가 경영의 기본은 바로 위대한 하늘의 나라 아래 전 세계를 끌어안는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데 있었다. 그 것도 철저히 몽골의 정신과 이념에 따르려 했다는 것이 국호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 중국 19개 왕조의 계승자로 보는 시각
그런데도 중국에서는 대원제국을 그 동안 중국 대륙에서 일어섰던 19개 왕조의 계승자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일단 모양 상으로 보면 그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송(宋), 금(金) 등 중국 땅에 들어섰던 왕조의 이름 사이에 원(元)을 끼워 넣어도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또 뒤에 오는 명(明)과 청(淸)을 이어 놓고 봐도 그렇다. 대원 제국에 앞서 중국 땅을 지배했던 주요 왕조들은 대부분 왕조의 발생지나 지명에서 나라의 이름을 따왔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 대원과는 차이가 있지만 무늬 상으로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 지금성]

물론 쿠빌라이가 모양 상 앞서 있었던 중국의 19개 왕조의 계승자처럼 보이게 만든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나라의 이름이나 도성의 모습뿐 아니라 통치방법이나 행정제도 운영 측면에서도 기존 중국 전통의 많은 부분을 받아 들여서 시행한 것이 그 것이다. 이는 쿠빌라이가 정주민의 땅인 중국을 원활하게 통치하는 방법으로 가능한 한 피지배자들에게 충격을 적게 주기 위해 많은 분야에서 기존의 중국 전통을 받아들여 시행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또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앞서 있었던 중국의 제도와 지식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쿠빌라이의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그 것을 합리적인 것은 받아들이는 그가 지닌 열린 마음의 소산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 몽골제국의 계승자 시각이 우세

[사진 = 만리장성]

중국의 많은 것을 받아 들여 시행했다 해서 대원제국을 중국 왕조의 계승 왕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중국 땅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여전히 쿠빌라이는 전체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전 제국의 통합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 제국 내 크고 작은 반발이 있기는 했어도 대부분의 분할된 지역이 쿠빌라이를 몽골제국의 최고 권위자인 대칸으로 인정했다.
 

[사진 = 울란바토르 외곽 오보]

훌레구가 이란 지역에 터를 닦은 울루스에 일한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 같은 상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일’이란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칸은 몽골제국의 종가인 대원제국에 복종하는 국왕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제국에 의한 유라시아 지역과 중국 대륙의 평화,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나가 가능했던 것이다.

▶ 하층민 취급받은 중국인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집사)]

만일 쿠빌라이가 중국 왕조의 계승자라면 중국인 한족을 하층민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신분사회에서 몽골인이 지배민족으로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당연하지만 나중에는 고려인들이 상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 다음이 위구르인과 이란인 등 색목인이 우대를 받았고 한족과 남송 정벌 후 편입된 남송인인 남인은 아래 층 신분으로 거의 정권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사진 = 울란바토르의 몽골인]

그런 점으로 볼 때도 중국의 왕조 계승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쿠빌라이의 대원제국은 그래서 몽골제국의 종주국으로서 바다와 육지를 장악하는 세계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 수순을 밟아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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