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눈눈이이’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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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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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酒食雜記

 

     [사진= 박종권 칼럼니스트]



‘눈눈이이’와 평화

“모두가 ‘눈에는 눈(Eye for an eye)’으로 대처하면 세상에는 장님만 남게 될 것이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말이다. 흑백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먼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다. 누군가가 먼저 용서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복수의 쳇바퀴는 멈출 수 없다.
함무라비 법으로 알려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모토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대응 방식이었다. 그래서 구약성서도 “사람이 만일 그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 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렇게 할 것(레위기 24:19~20)”이라고 적고 있다.
영어 ‘겟 이븐(get even)’의 원류이다. 자구 대로 해석하면 ‘똑같이(공평하게) 하다’는 것인데, 실제는 ‘복수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눈에 눈, 이에 이’다. 하지만 킹 목사의 말처럼 모두가 ‘눈에는 눈’으로 대하면 세상엔 장님만 남을 것이고, ‘이에는 이’로 대하면 종당에는 모두 잇몸으로 사는 신세가 되지 않겠나.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너희에게 이르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태복음 5:38~39)”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면 거절하지 말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가 보기에 세상에 ‘평화’가 정착되지 않는 것은 바로 굶주림과 복수 때문이다. 이 굶주림과 복수에서 비롯된 가장 비극적이고 비인간적 사건이 전쟁 아니겠나. 전쟁의 불길은 선(善)도, 악(惡)도, 옥(玉)도, 돌(石)도 함께 태워버린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이다. 전쟁에 정의는 없다. 오직 승리만이 정의로 분장(粉粧)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의 해법은 간단했다. 굶주리는 이 없도록 밥을 나눠 먹자, 복수의 고리를 내가 먼저 끊어 버리자는 것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요즘의 해석은 다르다. 당시에는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자기 먹을 도시락을 싸 들고 ‘산상수훈’을 들었다. 그래서 점심때가 되면 부자는 가득 준비한 진수성찬을 먹었고, 빈자는 물로 주린 배를 채웠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공용’으로 내놓는다. 나눠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자 5000 청중이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내놓았고, 부자와 빈자가 함께 먹었다. 서로 나눠 먹었는데,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밥상공동체’의 원형이자 요즘으로 말하면 분배를 통한 경제민주화이다.
‘주기도문’의 핵심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라”는 것이다. 굶주리지 아니하고 서로 다투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뜻’이 바로 나눠 먹고 용서하는 것이다.
평화(平和)의 한자를 보자. 평(平)은 울퉁불퉁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아니하고 고르다는 뜻이다. 화(和)는 ‘벼 화(禾)’에 ‘입 구(口)’가 결합됐다. 밥을 먹는 입이다. 결국 ‘평화(平和)’는 ‘고르게 밥을 먹는다’는 뜻이 아닌가. 곧 ‘함께 나눠 먹기’가 바로 평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의 저울추는 바로 ‘혼자 먹느냐’와 ‘함께 먹느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의 가르침은 용서와 화해인데, 십자군전쟁부터 최근 이라크전(戰), 대(對) 테러 전쟁까지 서방이 주도해온 세상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칠 날이 있었던가. 예수는 손을 들어 ‘사랑과 평화’를 가리키는데, 추종자들은 손가락만 바라보는 형국은 아닐까.
말이 그렇지, 용서와 화해가 어디 쉬운가. ‘권력의 의지’를 가진 인간에게는 지배욕이 꿈틀거리지 않겠나. 결국 밥과 주먹의 문제이다. 밥은 나눠 먹고 주먹은 펴 악수하면 된다. 굶주림을 없애고, 서로 악수하면 테러와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테러의 자양분은 기울어진 밥상과 복수의 쳇바퀴 아니겠는가. 전쟁의 역사에 경제문제가 개입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전쟁도 따져보면 ‘밥’ 문제이다. 따라서 식습관과 행동양식을 바꾸면 어느덧 암(癌)도 줄거나 사라지는 것처럼, 테러와 전쟁 위협을 대하는 정치적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위태로운 세상이다. 그럴수록 국사에 공자가 말한 ‘인(仁)’이 필요할 것이다. 논어 옹야편에 ‘인자선난이후획(仁者先難而後獲)’이라 했다.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면 인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득실부터 따지지 말라는 뜻인데, 당금 지도자들이 새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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