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샤오취안, 사진으로 세상과 소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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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령 기자
입력 2017-08-0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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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샤오취안은 일반인들을 렌즈에 담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평범하고 가장 흥미로운 사람들을 위해 최고로 감동적인 사진을 남기고자 한다. [사진=인민화보 친빈(秦斌) 기자]

1994년 그는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트라이어드’의 사진 담당으로 6개월 간 촬영팀과 함께 했다. [사진=샤오취안 제공 ]

1991년 봄, 베이징의 무톈위(慕田峪)장성에서 찍은 양리핑의 모습. 바람이 몹시 불던 그날 양리핑은 힘겹게 성벽에 서서 포즈를 취해야 했다. 샤오취안은 그녀의 떨리는 손에 쥐어진 비단 천이 마치 흰 구름처럼 공중으로 나부꼈다고 회상했다.[사진=샤오취안 제공]

1993년 9월의 어느 날, 그와 더우웨이는 새벽에 사진을 찍기로 했다. 당시 록그룹 흑표밴드(黑豹樂隊)를 떠나 레코드사 마암문화(魔岩文化)와 새로 계약을 맺었던 더우웨이는 훗날 장추, 허융과 함께 ‘마암삼걸(魔巖三傑)’로 불리게 된다.[사진=샤오취안 제공]

1995년 3월 베이징, 갓 설립된 ‘햇빛 쏟아지는 제작사(陽光燦爛制作公司)’ 건물 앞에서 장원을 대상으로 찍은 사진. 당시 32세의 장원은 ‘햇빛 쏟아지던 날들’을 찍고 있었다.[사진=샤오취안 제공]

쿤밍(昆明)과 진촨(金川)에서 찍은 일반인 사진[사진=샤오취안 제공]


인민화보 양윈첸(楊雲倩) 기자=‘중국 최고의 인물사진작가’라 불리는 샤오취안(肖全)을 인터뷰한 날은 마침 베이징 민성(民生)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그의 전시회가 막을 내리던 날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는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 관람객’으로서 필자를 성대히 환영하더니, 자신과 함께 세계를 떠돌았던 큼지막한 트렁크에 개인 소장품과 지인에게 받은 책 등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우리들 세대>는 그가 베이징에서 개최한 세 개 전시회 중 하나다. 앞서 그는 금일미술관(今日美術館)에서 <금일·샤오취안 초상(今日·肖全肖像)>, 아트스페이스 <후이>(官舍·會空間)에서 <뷰티풀 월드(美麗世界)> 전시회를 진행한 바 있다. 작품을 위해 이곳 저곳을 떠돌다 돌아온 그는 지난 2015년부터 집중적으로 전시회를 열며 관객들에게 자신의 ‘애장품’들을 꺼내 공개하는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친구이자 가수 겸 배우였던 이즈난(易知難)의 사진을 통해 그를 알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청두(成都) 음악계를 들썩였던 사진 속 그녀는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다. 이즈난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그의 사진과 관련된 자료가 많이 나온다. 아름다운 외모에 어딘가 슬퍼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그가 찍은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세월 속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전설’로 남았다.
샤오취안은 이에 대해 “훌륭한 사진은 기적과도 같다. 기적은 매일 일어나지 않고, 항상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세계적 사진작가 요세프 쿠델카의 말에 깊이 동감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1980, 90년대 가장 큰 명성을 누린 문화예술계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하나의 ‘기적’일지 모른다. 군 복무 시절 아버지가 준 180위안으로 생애 최초의 카메라인 ‘시걸(Seagull) 205’를 구입한 때부터 그는 평생을 사진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그러던 그가 인물사진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잡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는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온갖 세월의 풍파를 거친 결연한 눈빛으로 작은 석교(石橋) 앞에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 아래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그토록 어렵고 헛된 일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때의 사진 한 장과 한 마디 문구는 샤오취안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혔다. 그는 이것을 “지식인의 깊은 고독과 정신적 신앙”이라고 표현했다. 불현듯, 렌즈를 통해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를 위해 사진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무용수 양리핑(楊麗萍)의 춤사위, 천카이거(陳凱歌)·장이머우(張藝謀)·장원(姜文)의 영화, 구청(顧城)·궈루성(郭路生)·바이화(柏樺)·베이다오(北島)·수팅(舒婷)의 시, 더우웨이(竇唯)·허융(何勇)·장추(張楚)·추이젠(崔健)·주저친(朱哲琴)의 음악, 왕숴(王朔)·싼마오(三毛)·거페이(格非)·왕안이(王安憶)·류전윈(劉震雲)·스톄성(史鐵生)의 글…허름한 곳에서도 재능만큼은 눈부시게 빛났던, 당대 문화계를 이끈 선구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했던 그 시기는 예술창작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1984년 전역 후 청두로 돌아온 그는 당시 흔치 않던 전문 사진작가로서 1996년까지 10년 남짓 활동하며 문화계를 이끌어간 대표적 인물들을 렌즈에 담았다.
샤오취안에게 이들은 중국 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룩한 주역이면서 각자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사진으로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때는 이상주의가 만연하고 열정과 의욕이 하늘을 찌를 듯하던 시대였죠. 건물 옥상에 서서 도시의 불꽃이 사방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던 느낌이랄까요.” 따라서 샤오취안이 그들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시대가 샤오취안을 ‘낙점’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샤오취안은 2012년부터 렌즈를 일반인에게로 맞추기 시작했다. 유엔(UN)에서 펼치는 ‘우리가 바라는 미래(The Future We Want)’ 공익캠페인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일반인 32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스스로 수줍음이 많다고 말하는 그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서 그는 몇 년에 걸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주로 대자연과 풍경을 접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마주했을 때는 최대한 그들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개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편히 갖도록 배려하며 점점 자신을 신뢰하고 동질감을 느끼도록 했다. 그는 소통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바로 ‘진심’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어 일반인 피사체라는 주제로 탄생한 전시회가 바로 <금일·샤오취안 초상>이다. 전시 기간, 금일미술관 전시장에서는 관객 신청자를 대상으로 현장 촬영이 진행됐고, 촬영된 사진은 곧바로 새로운 전시품으로서 13.5m 높이의 커튼 월(curtain wall)에 투사되었다.
지금도 샤오취안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그대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 쌓이면서 여기에 약간의 여유로움이 더해졌다.
그는 프랑스의 유명 사진작가 마크 리부가 중국에서 작품을 찍던 기간 그의 가이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크 리부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샤오취안에게 그는 영원한 정신적 멘토이자 넘을 수 없는 고지이며, 일생의 목표이면서 든든한 ‘선배의 그늘’이기도 하다. 그에게 마크 리부가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바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아끼라’라는 그의 철학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저는 늘 ‘사진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제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세상과 대화하면서 이 세계를 표현하는 거죠.”
그는 사진 덕분에 많은 인연을 맺었고, 풍부한 정신적 자양분도 얻었다. 누구나 하나쯤 간직한 소중한 것들을 사진 속에 담아내고 사람들과 교감하며 성장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통해 위로 받고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가장 큰 소망이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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