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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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5-2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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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전승(戰勝)의 최고 덕목’으로 부대단결과 화합을 중요시하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전승(戰勝)의 최고 덕목(德目)’으로 부대단결과 화합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차일혁은 전투에서 이기는 전승의 주요 덕목으로 부대단결과 화목을 으뜸으로 쳤다. 지휘관과 부하들이 일치단결된 부대는 전투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차일혁은 독립군시절 실전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래서 차일혁은 전쟁승리의 3요소로 훌륭한 지휘관, 정보를 바탕으로 한 완벽한 작전계획, 그리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부대단결과 화합을 꼽았다. 실제로 차일혁은 그런 조건하에서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고. 타(他)의 추종(追從)을 불허하는 엄청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직책을 수행할 때 부대단결과 화합을 강조하며 실천으로 옮기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차일혁이 그렇게 하게 된 데에는 광복이후 파벌로 갈라진 경찰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광복이후 창설된 국립경찰은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됐다. 일본군으로 끌려갔다 온 학병(學兵) 출신, 일본군 장교 출신, 일제하 경찰 출신, 그리고 차일혁처럼 몇몇 되지 않은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경찰 내에서는 출신별 상호 알력이 심했고, 그로 인한 갈등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거의 독보적이라 할 독립군 출신의 차일혁도 그런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창설 직후 제18전투경찰대대도 고향과 출신이 달라, 그로인해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부대 내에는 말이나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간의 알력이 심했다. 낙동강전투를 경험한 경상도 출신 대원들은 전투에 있어서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한 반면, 전라도 출신 대원들은 “자기 고장은 자기가 지킨다.”는 애향심(愛鄕心)과 향토애(鄕土愛)가 유난히 강했다. 본격적인 갈등과 알력은 구이작전 과정에서 불거졌다. 경상도 출신 대원들은 생포한 빨치산들을 거리낌 없이 처단했으나, 전라도 출신 대원들은 고향이 같은 동향의 빨치산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했다. 자연 전라도 출신 대원들은 빨치산들에게 무관용(無寬容)으로 일관하면서 빨치산처단에 ‘용감’하기 그지없는 경상도 출신 대원들이 마냥 못마땅하기만 했다.

 거기에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 대원들 간의 상호 경쟁심과 주관이 뚜렷한 자존심이 개입되면서 반목(反目)도 점차 심해졌다. 그런 부대내 분위기를 차일혁도 얼마 되지 않아 느낄 수 있게 됐다. 구이작전 후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대원들 간의 ‘쌓여 있던 해묵은 갈등’이 마침내 분출됐다. 어느 날 경상도 출신의 이진찬 경위와 전라도 출신의 김진구 경위가 부역자처리를 놓고 말다툼을 하게 됐다. 그때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화랑소대장 이한섭 경사가 경상도 출신의 이진찬 경위에게 덤벼들었다. 이한섭은 차일혁의 친한 친구인 이존상의 동생으로 전라도 출신 대원이었다. 이한섭은 차일혁의 신임을 얻어 유자녀(遺子女) 대원들로 편성된 ‘화랑소대’의 소대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리더십을 갖춘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차일혁도 유난히 아끼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목숨을 건 임무를 부여하곤 했다. 그런 이한섭 경사가 ‘사고 아닌 사고’를 친 것이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이한섭의 상관인 이원배 2중대장으로부터 ‘이한섭의 하극상 사건’을 보고받은 차일혁은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차일혁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대드는 행위를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하급자인 이한섭 경사가 상급자인 이진찬 경위에게 몸싸움을 하며 대드는 것은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행위로 여겼다. 이는 부대단결을 가장 중요시하는 차일혁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엄연한 하극상(下剋上)이었다. 부대단결과 화합을 위해서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차일혁은 지금 그것을 할 수 있는 적기(適期)라고 여기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건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한섭 경사가 이진찬 경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하극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차일혁은 이한섭 경사의 행동을 중지시키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따져 물었다. 이한섭 경사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차일혁이 “네 자존심이 중요하냐, 부대질서가 중요하냐?”고 되물었다. 이한섭이 대답을 못했다. 차일혁은 “이진찬 경위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한섭은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이 하겠지만, 진심으로는 못하겠습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일혁도 우려했던 대로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한섭의 뺨을 후려 갈겼다.

 차일혁이 다시 한 번 “사과하라!”고 하자, 이한섭은 “진심으론 못합니다.”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차일혁도 부대단합을 위해서 이 문제를 더 이상 흐지부지하게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친동생 같은 이한섭 경사를, “제갈공명이 친구의 동생을 작전실패의 책임을 물어 울면서 목을 쳤던 읍참마속(泣斬馬謖)” 격으로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호되게 두들겨 팼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문제가 해결될 걸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차일혁의 그런 행동에 경상도 출신 간부들이 앞장서 나서며 “저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니 제발 그만두시라.”며 애원조로 말했다. 차일혁의 극약처방에 가까운 행동으로 그 문제는 가까스로 해결됐다. 비록 이한섭이 형처럼 믿었던 차일혁의 그런 행동에 한 순간 섭섭한 감정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한섭은 차일혁이 “왜 그렇게 행동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일혁 부대가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때 화랑소대장이던 이한섭이 특공대를 자청해서 목숨을 걸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임무를 수행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차일혁은 그 일이 있은 후 부대 단결과 화합을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에만 적용되는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다.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은 차일혁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부대를 떠날 수 없다는 규칙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부대원들이 상호 신뢰 속에 결속하며 단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는 부대 초창기 해이한 전투경찰의 군기를 확립할 뿐만 아니라 부대 단결에 절대 필요할 것으로 여겨졌다. 차일혁은 이의 실천을 위해 바로 행동에 옮겼다. 각 중대장을 소집하여 일장 훈시를 했다.

 “우리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전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휴가를 가서 돌아오지 않는 자도 반드시 잡아 오겠다. 내가 전출가려 한다면 중대장들이 나를 총으로 쏘아라. 중대장들이 전출을 원한다면 내가 그만두지 않겠다. 우리 모두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훈시를 마친 후 차일혁은 손가락을 깨물어 “적들과 싸우다 죽기 전에는 부대를 떠나지 않겠다.”는 내용의 혈서(血書)를 썼다. 우희갑, 이원배, 김진구 중대장들도 피로써 맹세를 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때 휴가 가서 복귀하지 않은 김영식 대원이 있었다. 복귀하지 않은 이유는 “전투 중에 죽을까 두렵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김진구 중대장을 불러 복귀하지 않은 김영식을 체포해 오게 했다. 죄목은 명령 불복종 및 빨치산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혐의였다. 그리고 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저 혼자 살려는 자는 빨치산과 똑같이 취급하겠다.”고 밝혔다. 차일혁은 잡혀 온 김영식을 부대 영창에 가뒀다. 김영식의 가족은 전북도경(道警) 간부로 있는 친척을 통해 여러 차례 선처를 호소했지만, 차일혁은 모른 체 했다. 1주일이 지나자 김영식이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며 눈물로 애원했다. 그제서야 차일혁은 김영식으로부터 단단히 다짐을 받고나서 부대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제18전투경찰대대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부대원과의 단결은 물론이고, 탈영이나 휴가 가서 복귀하지 않은 대원들이 없었다. 전투에 임해서도 용감했다. 중대장들의 돌격명령에 대원들은 죽을지 알면서도 과감히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후퇴하는 대원들은 중대장들에게 총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차일혁도 비겁하게 후퇴하는 중대장에게는 총을 겨누었다. 부대원 어느 누구도 비겁하게 후퇴하는 자가 없게 됐다. 단결과 화합으로 뭉쳐진 차일혁 부대는 점차 산중의 왕인 맹호(猛虎)처럼 변해갔다. 맹호는 제18전투경찰대대의 상징이었다. 그 중심에는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이 있었다. 차일혁의 부단한 노력으로 부대는 하루가 다르게 전국 최강의 빨치산토벌부대로 변했다.

 당시 전투경찰은 한직(閑職)이라 하여 대부분의 경찰들은 전투경찰을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설령 전투경찰이 되었다 해도 기회만 있으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차일혁 부대로 전입해 들어오면, 그 어떤 대원도 다른 부대로 전출 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차일혁도 이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전투를 통해 차일혁의 뛰어난 지휘력을 높이 산 상관들이 그를 데리고 가려고 안달했다.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최석용 대령이 그랬고, 8사단장 최영희 장군이 그랬고,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 신상묵 경무관이 그랬다. 승진과 출세를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차일혁은 부하들을 놓고 갈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차일혁을 비롯하여 간부 그리고 대원들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부대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렀기 때문에 대원들 간에는 갈수록 상호 신뢰만이 쌓여 갔다. 차일혁 부대에는 출신이나 지역별 파벌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있다면 모두 다 똑같은 차일혁 부대의 대원들뿐이었다. 차일혁도 그런 대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야영하며 목숨을 건 전투를 치렀다. 그러자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은 차일혁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게 됐다. 이로써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완전한 통솔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며 전투경찰로서는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우며 최고의 전투경찰 지휘관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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