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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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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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우리 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사랑했던 문화경찰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철저한 무인(武人)이면서도 우리 문화와 예술에 조예(造詣)가 깊었던 문화경찰이었다. 차일혁의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남달랐다. 차일혁은 “문화를 잃으면 우리의 마음을 잃고, 우리의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고 했을 정도로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는 범인(凡人)이 뛰어넘지 못할 일가견(一家見)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와 지적 수준도 매우 높았다. 그 때문인지 차일혁의 문화와 예술에 열정과 사랑도 대단했다. 차일혁은 우리 문화와 예술이라면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아끼며 좋아했다. 장르도 연극, 영화, 판소리, 문화재 보호 등 다양했다. 차일혁은 우리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좋아하는 편이었다. 차일혁은 문화 및 예술과는 동떨어진 빨치산토벌대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할 때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차일혁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들을 위해 우리 문화와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배려했다.

 빨치산 토벌작전 중에도 차일혁은 기회가 닿으면 전투에 지쳐있는 부하들을 위해 예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1951년 4월 중순경,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는 전라남북도 경계에 있는 갈재에 주둔하며 빨치산부대인 왜가리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갈재는 장성에서 전북 정읍으로 넘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곳으로 산세가 만만치 않은 험준한 준령(峻嶺)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서 흔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당대 이름을 날리던 백조가극단이 전남 광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전주로 가던 중 갈재 부근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고, 타고 가던 트럭 3대 중 2대가 불타고 1대가 고장이 났는데, 다행히 차일혁 부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됐다.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1대의 트럭에는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백조가극단의 단장 전옥을 비롯하여 김승호, 최남현, 황금심, 고복수, 원희옥, 김영준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타고 있었다. 하마터면 총격으로 죽을 뻔 했던 백조가극단 일행은 산중에서 뜻하지 않게 제18전투경찰대대의 보호를 받게 됐다. 차일혁은 부하들에게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는 단원들을 잘 보살펴주라고 지시한 다음, 전옥 단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전옥에게 “우리 대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공연을 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제의했다. 그 말을 듣고 가극단장 전옥은 난감해 했다. 무대도 조명도 없는 곳에서 갑작스럽게 공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가 아니었던가. 전옥은 차일혁에게 “백조가극단 배우들은 무대에서만 공연을 합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차일혁은 부하들에게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을 보여주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다시 나섰다.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으로 무대와 조명, 마이크 시설을 준비하겠다.” 전옥 단장도 차일혁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부하사랑에 감복해서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백조가극단이 예정에도 없던 공연을 산속 진중(陣中)에서 하게 됐다. 그것도 한밤중에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투지역에서 전투경찰대원과 빨치산 포로들을 관객삼아 ‘기묘한 공연’을 하게 됐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와 빨치산 2천여 명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살기(殺氣)가 번뜩이는 작전지역에서 이뤄졌다. 그럼에도 공연이 시작되자, 이내 흥겹고도 구슬픈 노래와 배우들의 목소리가 적막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중 주인공 전옥은 눈물의 여왕답게 눈물연기와 함께 슬픔을 극대화하는 연기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나리는 밤’에서 전옥의 독백연기는 압권이었다. 한때 적으로 싸웠던 관객들은 ‘피 튀기는 전장’의 시름도 잠시 내려놓은 채,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을 훔치며 서서히 연극에 빠져들었다.

 그때 빨치산의 습격이 있었다.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총알이 난무하면서 쫓고 쫓기는 자의 고함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배우들은 혼이 나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차일혁과 전투경찰대대의 침착한 대응으로 상황을 신속히 수습했다. 상황이 수습된 것을 보고 차일혁은 다시 공연을 재개하도록 했으나, 빨치산의 기습으로 넋이 나간 배우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차일혁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있지만, 빨치산과 우리 대원들이 관객으로서 하나 되어 모여 있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이 공연은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뜨거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뜻 깊고 역사적인 자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공연재개를 부탁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전옥 단장도 차일혁의 예술사랑과 부하들에게 우리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려는 열정에 얼어붙은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다시 공연이 재개됐고,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차일혁의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부하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이 끝난 후 충주경찰서장으로 재직할 때 경찰서 옆에 있는 빈 건물을 극장으로 개조하여 백조가극단과 판소리 명창(名唱)인 임방울 선생을 초청하여 공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차일혁이 문화경찰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이처럼 다 이유가 있었다.

 차일혁의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차일혁은 빨치산토벌 중에 영화촬영을 지원했다. 1951년 10월 전북일보에는 ‘애정산맥(愛情山脈) 현지(現地) 로케’이란 제목 하에 ‘철주부대(鐵舟部隊)동원 대 스펙타클’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촬영장소는 빨치산토벌 작전지역인 무주, 진안, 김제, 전주 등지였다. 여기에 차일혁이 지휘하는 철주부대가 발 벗고 지원했다. 영화 ‘애정산맥’에는 당시 국내 최고의 배우였던 이집길과 이희숙 등이 출연했고, 영화 ‘애정산맥’은 1953년 6월 3일 전국 극장가를 강타하며 1위를 차지하는 흥행을 보였다. 차일혁이 영화 ‘애정산맥’과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은 이랬다. 1951년 10월 초순경, 격렬한 전투에 시달리던 차일혁 부대에 우주영화사 배우와 감독 그리고 카메라맨들이 찾아왔다. ‘애정산맥’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영화감독 이만흥은 전북경찰국과 합동으로 ‘애정산맥’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영화 내용은 전라북도를 배경으로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관과 빨치산인 옛 친구, 그리고 그의 처 사이에서의 애증과 갈등을 그린 작품이었다.

 차일혁은 작전지역에서 촬영하는 ‘애정산맥’ 제작에 많은 도움을 줬다. 영화 줄거리도 빨치산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을 모델로 해서 구성됐다.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만한 영화 소재도 없었다. 차일혁은 각종 전투장면을 촬영할 때도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줬다. 출동장면이나 진중참모회의, 그리고 전투장면을 찍을 때 적극 나서서 도와줬다. 영화 제작팀은 차일혁의 그런 적극적인 도움과 문화적 소양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울러 차일혁도 빨치산들이 준동하는 작전지역에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며 영화촬영에 임하는 ‘애정산맥’ 제작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그렇게 해서 공전(空前)의 흥행을 거둔 영화 ‘애정산맥’이 빛을 보게 됐다. 차일혁의 문화적 소양과 도움에 힘입어 영화 애정산맥의 질적 완성도가 크게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차일혁은 우리나라의 문화재도 소중히 다루며 아꼈다. 차일혁의 작전지역 내에는 숱한 문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천년의 세월을 우리 민족의 애환(哀歡)과 함께 한 이 땅의 천년 고찰(古刹)들이었다. 천년 고찰은 귀중한 문화유산이었지만 빨치산 토벌작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빨치산들은 깊은 산중에 있는 절을 은거지로 활용하여 토벌작전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숲이 푸르러지는 녹음기(綠陰期)가 되면 절은 빨치산의 소굴 역할을 했다. 그래서 토벌지역 내에 있는 절들에 대해서는 불로 태우는 소각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구례 화엄사도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됐다.

 1951년 5월 상황이었다. 녹음기를 앞두고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이나 암자를 소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때 차일혁은 천년 고찰 화엄사를 기지를 발휘하여 구해냈다. 차일혁은 원래 사찰을 소각하라는 이유가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는데 있으니, 문짝만 떼어 태우면 관측과 사격이 용이해서 절을 태우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절을 태우는 대신 문짝만 떼어 태웠다. 그렇게 해서 국보 각황전이 있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지리산 인근지역의 천년고찰들이 전쟁의 화마(火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차일혁이 있었다. 차일혁은 불을 태우려는 자들을 향해 일갈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고. 이 일로 차일혁은 1958년 초대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의 감사장을 받았고, 1998년 화엄사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2008년에는 문화재청장의 감사장이 수여됐고, 같은 해 우리나라 경찰관으로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받게 됐다.

 차일혁은 문화 예술인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충주경찰서장 시절 인연이 있던 예술인들을 자신이 개조하여 만든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자주 초청했다. 명창 임방울 선생을 비롯하여 백조가극단 등도 차일혁의 초청으로 이곳에서 공연했다. 그런데 어느 날 모 악극단이 차일혁의 초청을 받아 충주에 왔다가 공연에 실패함으로써 악기와 그 밖의 여러 기자재들을 여관에 저당 잡히고 사람까지 인질로 잡히는 불상사가 생겼다. 이때 차일혁은 자기가 초청한 악극단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는 ‘나 몰라라’하지 않고 돈을 대신 갚아주고 악극단원이 풀려 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이 악극단은 공연에 성공하여 차일혁에게 신세진 돈을 모두 갚았다. 차일혁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문화 예술인에 대해서는 더했다. 차일혁은 이런 문화 활동을 통해 경찰도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겼던 문화경찰이었다. 문화나 예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경찰사회에 차일혁은 ‘문화경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것은 성공이었다. 국민들의 경찰에 대한 인식이 부드럽게 바뀌었고, 불교계도 천년사찰을 보호한 차일혁으로 인해 호의적으로 변했다. 문화계도 ‘제복(制服)입은 무섭고 위압적인 경찰’이 아닌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문화경찰’이라는 인상을 받게 됐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은 ‘문화경찰의 선구자이자 대부(代父)’로서 역사적 평가와 함께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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