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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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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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부역자들을 용서하고 숨겨줬던 빨치산 토벌대장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유난히 사람을 좋아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했던 사람까지도 감싸며 보호했다. 차일혁이 겉으로는 차돌처럼 딱딱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속내는 솜털처럼 부드러우면서 누구보다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차일혁의 지우(知友)였던 전북일보의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그런 차일혁을 보고 “한낱 강한 의지만을 가진 무장(武將)이 아니라, 의리와 인정과 사랑과 눈물을 아울러 가진 ‘정(情)의 인(人)’이다”라고 평가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그런 면면(面面)들은 토벌작전을 통해 하나씩 드러났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처녀출전’한 구이작전에서 빨치산과 내통한 주민들로 인해 많은 부하들이 희생당했다. 그때 차일혁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했다. 그들이 적과 내통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고심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인공시절 총상(銃傷)을 당해 원기리에서 숨어 지낼 때 차일혁을 피신시켜 준 사돈 이의창(李義昌)과 그곳 면장이 찾아왔다.

 사돈은 부역한 사람들을 모두 자수시킬 테니 그들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차 대장,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나도 인공시절 부역(附逆)을 했지만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느 누구도 부역을 마다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제 인민군을 몰아냈으니 같은 마을 주민끼리 죽고 죽이는 일만은 막읍시다. 갈치가 갈치꼬리 무는 격 아닙니까. 구이면은 원래 전주와 가까우면서도 오지에 접해서 씨족간의 갈등이 심했는데 이제 평소 미워하던 사람끼리 서로 이간질하는 흉흉한 마을로 변해버렸습니다. 주관이 강한 사람들은 다 죽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무골호인(無骨好人) 허허실실(虛虛實實) 바보 같은 사람들만 살아남았어요. 우리 아들놈도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았습니까. 이제 더 이상 피를 보는 일만은 막아 주십시오.”

 면장도 가만있지 않았다. “우리들도 인공시절에 살기 위해서 부역을 했지만 그때도 많은 사람을 살려주기도 했습니다. 처벌해야 한다면 우리부터 처벌해 주십시오. 더 이상 무고한 살상만은 없게 해주시오. 사실 피난가지 못한 사람 중에 ‘인민군’에게 밥 한 번 안 해주고, 노래 한 번 따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모두 협조해야만 했었습니다.”

 차일혁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닌 주민들, 나아가 그들 중 좌익에 동조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겠다. 공산주의의 꼬임에 넘어가 입산을 하고 빨치산활동을 했다하더라도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차일혁이 보기에 빨치산들도 여러 형태를 보였다. 빨치산이라고 해서 다 같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빨치산들도 개개인에 따라 ‘당성(黨性)’에 많은 차이를 보였다. 포로가 됐을 때 마치 순교(殉敎)라도 하듯 자살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생포되려고 일부로 도망치지 않는 자도 있었다.

 부상당하지 않았는데 포로가 된 빨치산은 귀순(歸順)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런 빨치산들은 대부분 동료들 때문에 투항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자였다. 빨치산들은 부상당하지 않았음에도 포로가 된 자를 용서치 않았다. 그런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복을 했다. 차일혁은 이런 잘못된 보복의 악순환을 자신이 끊어 놓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일혁은 빨치산들 중 귀순한 정황이 인정되고, 개전의 정이 보이면 귀순자로 처리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차일혁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우선 구이면에서 생포한 5명의 빨치산을 죽이지 않고, 귀순자로 처리해 취사반에서 일하도록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물든 ‘골수 빨치산’이라기보다는 구이면 주민들로서 ‘단순 빨치산’에 가까웠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 인근 주민들을 모아 놓고 즉석연설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구이면에서 괴뢰군의 총에 맞은 적도 있고 또 다락에 숨어 치료도 받고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또 나와 같은 유격대원 15명이 옹골연에서 생포되어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수복된 뒤 처녀출전이기도 합니다만, 나와의 인연이 특별한 곳입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 여러분들을 대하지는 않겠습니다. 전주시 부시장을 사살한 구이면 분주소장 황준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방면시킬 테니 주위에 부역한 일로 숨어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자수시키십시오. 아무리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수하면 당국에서 관대히 처분하도록 저도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씨족간의 알력 같은 한풀이는 더 이상 하지 맙시다.”

 차일혁의 연설을 들은 주민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차일혁의 모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런 불교집안에서 자란 차일혁은 일찍이 학교선생님을 체포하러 온 일본경찰을 구타하고, 금강산 신계사에서 피신해 있을 때 불법(佛法)에 심취했던 관계로 불필요한 살상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전투 중 총을 쏘는 빨치산들은 어쩔 수 없지만, 빨치산을 토벌한 후에는 불필요한 살생을 피하고 싶었다. 특히 주민들 간의 밀고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복의 악순환이었기 때문이었다. 토벌작전이 끝난 후 가장 ‘무서운 일’은 주민들끼리 서로 헐뜯으며 밀고(密告)하는 경우였다. 그럴 경우 주민들 간의 원한과 증오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일혁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차일혁은 밀고하는 주민들이 오면 혼쭐을 내서 돌려보내곤 했다. 이웃 간의 보복의 악순환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선처했다. 그런데 부역자 중 차일혁을 난감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부역자 중 차일혁의 왼쪽 팔을 못 쓰게 만든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일혁이 옹골연유격대장 시절 피신하다가 총을 맞고 사경(死境)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가 부역자 무리에 끼여 차일혁 앞에 나타났다. 일순(一瞬) 차일혁도 어떻게 처리할까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이를 알고 있던 부하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었다. "대장님, 저런 자를 살려두면 안됩니다. 가능한 한 용서해준다고 했지만 저런 악질적인 사람까지 용서해 준다면 적과 싸우는 우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차일혁은 부하들을 진정시킨 다음 그 자에게 말했다. “네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니 나도 용서하겠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지(死地)에서 살아난 그는 차일혁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절을 한 뒤 돌아갔다.

 유가족 대원들의 반발이 워낙 커서 결단을 내리기 힘들었지만, 차일혁은 그를 과감히 용서해 줬다. 불심(佛心)이 남달리 깊은 차일혁이라도 자기를 죽으려고 무차별 총을 쏘고, 그로 인해 팔을 못 쓰게 만든 자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부처님의 마음을 담아 그를 용서해 줬다. 차일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차일혁은 이들 부역자 들 중 쓸 만한 자들을 골라 대원으로 삼았다.

 이를 지켜보던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도 차일혁을 아끼는 마음에서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차 대장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소. 뜻은 좋지만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소.” 차일혁도 지지 않았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가 그들의 신원 보증서를 쓰고 부대에 편입시키겠습니다.” 이때 도경사찰과장이 “차 대장은 이미 귀순자들을 부대에 편입시켜 작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저도 그들을 위해 신원 보증서를 쓰겠습니다.”라며 거들었다. 그때서야 도경국장은 “차 대장 이러다가 빨치산토벌부대가 빨치산부대가 되고 말겠구먼”하고 흔쾌히 수락했다. 차일혁이 생포하거나 귀순한 공비를 부대원으로 편입시키자, 처음에는 주변에서 많은 오해와 불신을 했지만, 전투를 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차일혁은 부역행위를 했든, 빨치산 활동을 했든, 가능한 그들을 관대히 용서하고 부대원으로 만들었다. 차일혁은 그런 부하들의 존경을 받으며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나갔다. 적으로서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었다.

 차일혁은 유별나게 정이 많았다. 그런 탓으로 차일혁은 자기 집에 오는 사람들을 결코 내치지 않았다. 전쟁 중임에도 차일혁의 집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런저런 사연을 들고 많은 사람들이 차일혁의 집을 찾아왔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대장이라고 하지만 경찰 경감의 봉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족이 겨우 풀칠할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일혁의 좁은 집에는 늘 40-50명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단순히 피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인공시절(人共時節)’ 부역한 친척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탄로 날까봐 차일혁의 집에 피난 와 있었다. 그러다보니 빨치산 토벌대장의 집에는 좌익과 우익이 함께 기거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럼에도 차일혁과 그의 부인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식량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 온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해 줘야 했다. 들어오는 수입은 매달 뻔한 데 벌린 입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보니 가끔 집에 오는 차일혁의 밥상에도 무를 채처럼 썰어 곡식과 함께 끓인 ‘무밥’이 매번 올랐다. 무밥이 아닐 때는 시래기 밥이었다. 여기저기서 시래기를 얻어다가 곡식을 넣어 끓였다. 반찬은 누구 할 것 없이 김치 두 쪽이었다. 굶지 않고 허기를 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겼다. 많지도 않은 경감 봉급으로 수 십 명에 이르는 ‘식객(食客)’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그야말로 ‘배고픔과 싸우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특별대우 받지 않았다. 배고픔이 일상화됐다. 어느 날 차일혁의 막내가 배가 고픈 나머지 다른 사람이 먹다버린 고구마 껍질을 주워 먹었다. 그때 차일혁은 막내를 몹시 꾸짖으면서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워졌다.

 그랬다. 차일혁은 누구보다 베풀며 살려고 했다. 그것도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아니라, 어렵고 불쌍하고,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정말로 ‘처지가 딱한 사람들’에게 온정과 사랑을 아낌없이 줬다. 거기에는 빨치산과 내통함으로써 부하들의 목숨을 앗아간 내통자(內通者)들도 있었고, 북한점령기 ‘인공치하(人共治下)’에서 빨치산에 협력한 부역자(附逆者)들도 있었고, 인공치하에서 ‘옹골연유격대’를 조직하여 목숨을 건 사투(死鬪)를 벌일 때 극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먼 친척들 중 부역자로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집으로 숨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차일혁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는 고려치 않은 채 그들을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矜恤)이 여기고 보살폈다. 어쩌면 그것은 차일혁의 ‘타고난 불성(佛性)에서 나온 고매한 품성(稟性)’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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