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29)] 홍콩과의 '화학적 결합' 모색하는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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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2-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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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전속도'의 상징인 선전 국제무역센터. 과거 1992년 덩샤오핑이 이곳 꼭대기층 회전식 식당을 방문해 개혁개방을 강조했다. 회전식 식당의 이름이 '덩궁팅(鄧公廳)'인 이유다. [그래픽=임이슬 기자]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2012년 시진핑(習近平) 총서기가 취임한 직후 중국 '개혁ㆍ개방 1번지'인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으로 가장 먼저 달려갔다. 당시 시 주석의 닷새 간의 광둥성 시찰을 인민일보는 ‘신남순강화(新南巡講話)’라고 평가했다. 과거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에 빗대 나온 말이다.

시진핑 주석의 남순강화 2주년을 기념한 지난 8일 선전 첸하이(前海)에는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 렁춘잉(梁振英) 홍콩 행정장관, 왕룽(王榮) 선전시 서기 등이 모였다. 이날 선전시는 홍콩과 손 잡고 청년 기업가들을 위한 ‘스타트업 허브(靑年夢工廠)’를 짓겠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화웨이와 ZTE, 텐센트 등을 탄생시키고 중국판 코스닥인 ‘차스닥’을 운영하고 있는 선전의 야심작이다. 홍콩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선전은 홍콩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등에 업고 홍콩과의 ‘화합적 결합’을 시도 중이다.

선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광둥성 보안(寶安)현에 속한 인구 2만의 작은 농어촌 마을이었다. 선전이라는 지명도 ‘깊은 논두렁(圳)’에서 유래됐다. 선전이 오늘날 1인당 소득이 2만2000달러로 베이징·상하이를 제치고 중국 대륙 1위의 ‘부자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개방 덕분이다.

선전은 지난 1980년 8월 개최된 중국 제5기 전국인민대회 3차회의에서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에 의해 주하이(珠海), 산토우(汕頭), 샤먼(厦門)과 함께 중국 4대 경제특구로 지정돼 외자유치 첨병 역할을 담당했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흑묘백묘론’을 외쳤다. 선전특구는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실험장이었다. 덩샤오핑은 직접 선전을 찾아 개혁개방을 지지했다. 그 유명한 ‘남순강화’다. 선전 중심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롄화산(蓮花山) 꼭대기에는 전국 최초의 덩샤오핑 동상도 세워져 있다. 선전은 그야말로 ‘덩샤오핑의 도시’였다.

선전은 홍콩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다. 홍콩 주룽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45분만에 닿는다. 홍콩과 마카오, 글로벌 자본, 그리고 선전의 저렴한 노동력이 결합돼 선전은 현대 공업도시로 급속히 변모했다.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서 동쪽(홍콩)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눈에 봄이 가득하다는 뜻의 ‘동방풍래만안춘(東方風來滿眼春)’이라는 옛 시를 인용한 이유다. 선전에서는 인민폐보다 홍콩달러가 통용됐다. 선전은 ‘사회주의식 홍콩’을 모방한 도시였다.

경제특구 지정과 함께 선전시는 빠르게 경제력을 불려나갔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선전시 GDP는 평균 47%씩 성장했다. 23만명에 불과했던 선전시 인구도 10년만의 250만명에 육박하는 거대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전은 자본주의 빌딩 숲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선전에서 건물을 지으면 사흘에 한층씩 올라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른바 '선전 속도'다. 

중국 베이징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개혁개방을 학습하기 위해 수십만명의 시찰단이 선전으로 몰려들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개혁개방 학습차 지난 2006년 1월 선전을 둘러보았다. 

1990년대초 중국에서는“돈을 만지려면 선전으로 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전국 각지 젊은이들이 돈을 벌러 선전으로 몰려왔다. 중국 베스트셀러 작가 이중톈이 저서 독성기(讀城記)에서 "선전특구는 매우 젊다. 젊은 선전에는 청춘분위기가 물씬 풍긴다”고 말한 이유다.

극심해지는 자본주의로 선전에는 부패 범죄 등과 같은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동산과 물가도 ‘선전 속도’로 치솟으며 빈부격차는 심화됐다. 사회주의 국가 아래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오히려 "창문을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파리도 들어오기 마련"이라며 굴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 중국 다른 지역에서도 서서히 외자에 문을 개방하면서 선전은 더 이상 외국인 투자의 매력이 되지 못했다. 여기에 고도성장 과정에서 고임금과 부동산 가격 급등, 관료부패 등 문제점 노출되고 노동집약적 산업 역시 한계에 달하며 '경제특구'라는 의미는 크게 상실됐다.

이에 선전은 노동집약산업을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하이테크 산업으로 전환하는 제2의 개혁개방 도약 꿈꾸고 있다. 2010년엔 기존의 327.5㎢에 불과했던 선전특구 면적도 1948㎢까지 늘리며 도시 전체를 특구로 지정했다.

금융·물류 서비스 부문을 특화한 첸하이특구도 만들었다. 이른 바 ‘특구 속의 특구’다. 선전의 튼튼한 인프라와 홍콩의 글로벌 경쟁력을 바탕으로 첸하이에서는 금융서비스 부문에서 파격적인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첸하이 특구에는 세계 각지 기업들이 몰려오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11월말까지 첸하이특구 입주 기업은 253개에서 1만7778개로 69배가 증가했다. 등록자본도 165억 위안에서 1만1974억 위안으로 71배가 늘었다. 특히 금융기업 수가 152개에서 1만196개로 66배 늘었다. 세계 500대 기업도 11곳에서 53곳으로 4배 늘었다. 한편 우리나라 코트라 무역관도 지난 8일 처음으로 선전에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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