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華초대석- 3> 중국미술계의 판도를 바꾼 화가 장샤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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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1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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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저축은행 게이트와 관련한 부정 뇌물에는 각종 고가 미술품이 포함돼있었는데 그중에는 장샤오강(張曉剛)이라는 중국 현대회화작가의 작품이 끼어있어 관심을 끌었다. 장샤오강은 한국 미술업계에서 오래전부터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장샤오강의 작품이 비록 부정한 '게이트'와 연루된 고가의 뇌물로서 우리 일반인들에게 선을 보이게 됐지만 세계 현대 회화 분야에서 장샤오강이라는 중국 작가는 몸값이 최고에 달하는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실제 장샤오강의 작품은 세계적인 미술 경매 업체인 소더비에서 110억 원을 기록하면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1958년 중국 위난(云南)성 쿤밍(昆明)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쓰촨(四川)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근현대 중국의 예술기법으로 혁명시대의 다양한 가족, 혈연관계 등을 그려내어 97년 영국 국제예술기금회로부터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예술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장샤오강은 평소 말수가 적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그림이 유일한 취미였다고 주변사람들은 말한다. 국가 간부였던 부모를 따라 쓰촨성 청두(成都)를 거쳐 윈난지역에 살게된 그는 17살 때 수채화 및 유화의 1인자였던 린링(林聆) 선생을 만나 그림의 기초를 배우고 쓰촨(四川)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80년대 당시 미술사조는 소련의 현실주의 기법이 주목받을 때였다. 학교가 인정하지 않는 서양의 인상주의 기법에 빠져들면서 장샤오강은 졸업시험에 수차례 낙방하는 등 고독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졸업 후 그는 유리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쿤밍시 공연단의 미술 담당을 맡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동료와 함께 1984년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에서 첫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모교인 쓰촨미술대학 교수가 됐고 서양미술기법 단체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늘려나갔다. 그리고 그는 ‘대가족’ 이란 시리즈를 내면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한 매체인터뷰에서 “대가족이란 작품을 내면서 나의 예술적 방향을 정하게 된 것 같다”며 “이 시리즈에는 나의 개성과 심리적인 부문이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장샤오강이 우연히 발견한 가족사진을 보고 만든 작품 ‘혈연-대가족’ 에는 그만의 작품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인물들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고 사진 속 배경은 마치 서랍 속 빛 바랜 흑백사진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러한 작품 속에 붉은 선과 강렬한 색채를 넣어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당시 문화혁명, 천안문 사태를 경험한 이들의 고뇌, 격정, 슬픔을 표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오늘날 그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문화혁명이 시작됐을 때 나는 8세였다. 당시에는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기뻐했지만 이후 내가 어른이 됐을 때 누군가가 그것이 문화혁명임을 알려줬다. 그 이후로 나는 즐거운 기분을 가질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대가족’(1995), ‘혈연-대가족’(1998), ‘망각과 기억’(2006) 외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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