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일본 소프트뱅크의 스위스 ABB 로봇 사업 인수에 제동을 걸었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을 결합한 피지컬 AI 산업을 선점하려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구상이 중국의 규제 장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5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는 소프트뱅크에 ABB 로봇 사업 인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10월 약 54억달러에 ABB 로봇 사업을 인수하기로 합의했으며, 올해 2월 중국의 반독점 심사도 통과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국가안보 심사에서 최종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중국이 우려한 것은 로봇 기술과 데이터의 해외 유출이다. ABB는 1992년 중국에 진출한 이후 현지 생산기반을 구축했으며, 중국 고객에게 판매하는 로봇의 90% 이상을 중국에서 생산한다. 현지 고용인원도 약 1만2700명에 달한다. 중국 정부와 상하이시가 대규모 로봇 생산시설 건설을 지원할 정도로 중국 산업 생태계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중국 당국은 소프트뱅크가 인수 이후 중국에서 축적된 로봇 운용 데이터와 기술을 해외로 이전하고, 이를 AI 모델 학습에 활용할 가능성을 경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소프트뱅크가 주요 투자자로 참여한 오픈AI와의 연계 가능성도 우려한 것으로 FT는 전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발표된 미국 반도체 기업 마벨의 광통신 기업 루멘텀 인수도 주목된다. 마벨은 지난 2일 루멘텀을 주식교환 방식으로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루멘텀의 기업가치는 약 1150억달러로 평가된다. AI 데이터센터의 핵심인 전기 신호 처리 반도체와 광통신 부품을 하나의 기업집단으로 통합하는 대형 거래다.
마벨은 고속 DSP와 네트워크 반도체에 강점을 갖고 있으며, 루멘텀은 고성능 레이저와 광학 부품, 인화인듐(InP) 기반 광반도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두 회사가 결합하면 AI 데이터센터의 데이터 전송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폭넓게 확보하게 된다. 문제는 중국 광모듈 산업이다. 중지쉬촹(中際旭創), 신이성(新易盛), 톈푸퉁신(天孚通信) 등 중국 기업들은 세계 광모듈 시장에서 강력한 제조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DSP와 고성능 레이저 등 일부 핵심 부품은 마벨과 루멘텀에 의존하고 있다. 마벨과 루멘텀의 합병은 중국 기업의 핵심 부품 조달과 가격 협상력, 차세대 기술 개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 거래는 중국의 심사대상으로 판정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반독점법은 해외 기업 간 합병이라도 일정한 중국 내 매출 요건 등을 충족하고 중국 시장 경쟁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적용된다. 마벨과 루멘텀의 중국 사업 규모를 고려하면 중국의 규제 심사는 거래 종결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마벨과 루멘텀 역시 합병계약에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 규제 당국의 승인을 거래 종결 조건으로 명시했다. 다만 양사의 공식 발표에서 중국의 승인을 별도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은 다양하다. 중국 고객에 대한 차별 없는 부품 공급을 조건으로 승인할 수도 있고, 배타적 공급이나 차별적 가격 정책을 제한할 수도 있다. 합병이 중국 시장의 경쟁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판단하면 합병을 불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ABB 사례와 마벨·루멘텀 사례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ABB는 중국 내 로봇 사업과 기술, 데이터의 통제권 이전이 국가안보 심사의 핵심이었다. 반면 마벨과 루멘텀은 중국 광통신 시장의 경쟁과 핵심 부품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이 우선적인 심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중국이 국가안보 심사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법률적 판단이 필요하다. 확실한 것은 마벨·루멘텀 건은 중국이 육성중인 첨단기술 분야와 겹쳐있는 만큼 까다로운 심사기준이 적용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반도체와 AI 모델을 넘어 로봇·광통신·데이터로 확산되면서, 중국의 규제 장벽이 글로벌 첨단기술 기업들의 사업 재편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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