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만회.’
19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27초짜리 영상이 인스타그램에서 기록한 조회수다. 가을 뉴욕을 배경으로 바비 인형처럼 흠잡을 데 없이 생긴 미남·미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배우도, 이들이 서있는 배경도 모두 인공지능(AI)이 만들어냈다.
실제 배우가 연기한 듯한 이 영상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캐릭터로 영화를 만들어 달라”, “넷플릭스에서 방영해야 한다”,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슬프다”, “다음 편은 언제 나오냐” 등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영상을 만든 곳은 드림폴·아트 스튜디오다. 이들은 SNS 팔로어가 200만명이 넘고, 콘텐츠 월간 조회수가 3억회를 웃돈다고 밝히고 있다. 브랜드 파트너십도 50건이 넘는다. 얼마 전까지 기괴하거나 신기해서 보던 AI 영상이 이제는 시청자가 캐릭터에 몰입해 다음 편을 기다리는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댄스, 클링, 해피호스 등 중국의 생성형 AI 영상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가운데 '배우'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런던 출신 여배우''로 세계관을 설정한 AI 배우 틸리 노우드는 코미디 영화 '미스얼라인드'의 주연을 맡으며, 최근 CNN과 인터뷰도 했다.
중국판 넷플릭스로 통하는 아이치이(iQIYI)의 궁위 창업자는 배우와의 촬영이 머지않아 과거의 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숏폼 드라마와 라이브커머스를 중심으로 AI 배우와 진행자가 사람을 대신하고 있다. 중국온라인시청각프로그램서비스협회(CNSA)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국에서 공개된 숏폼 드라마 약 12만8000편 가운데 95%가 AI로 제작됐다.
미국에서도 숏폼 드라마 시장의 성장과 함께 AI 도입에 속도가 나고 있다. NBC유니버설은 스트리밍 서비스 피콕에 세로형 영상을 도입한 데 이어 AI를 활용한 영상 기능을 확대하고 있다. 폭스도 세로형 영상 플랫폼 홀리워터에 투자하고 향후 2년간 200편이 넘는 숏폼 영상 작품을 공동 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밋빛만은 아니다. AI가 사람을 대신하면서 문제도 생겨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일반인이 자신의 얼굴 사용권을 AI 콘텐츠 제작자에게 제공하고 돈을 받는 '얼굴 라이선스' 시장까지 등장했다. 일부 제작 현장에서는 배우나 진행자에게 얼굴, 목소리, 움직임 등을 AI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강요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얼굴과 이름, 목소리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요소의 상업적 이용을 통제하는 '퍼블리시티권'을 법제화하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국회에 관련 법률안이 발의돼 있다.
"늑대인간·뱀파이어도 AI로 뚝딱"
AI와 결합한 숏폼 드라마 시장의 성장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서울 코엑스에서 연 '2026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벌 숏폼 드라마 플랫폼 넷숏은 AI를 활용해 늑대인간, 신화, 판타지, 초능력 등 장르물을 쏟아내고 있다. 넷숏은 후발주자다. 2024년 9월 서비스를 본격화하며 경쟁사보다 1년가량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업계 3위에 올랐다.
비결은 AI다. 앨리 리 넷숏 비즈니스 개발 총괄은 지난 15일 BCWW 기조연설에서 AI 덕분에 수개월 걸릴 프로젝트도 단 며칠 만에 완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 숏폼 이용자가 20억명”이라며 “기존 실사 제작 방식으로는 시장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새로운 시청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AI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AI의 강점은 속도만이 아니다. 그는 "더 큰 가치는 실사로 제작하기 어렵거나 많은 비용이 드는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라며 "늑대인간, 뱀파이어, 마법의 세계, 미래 도시도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결국 시청자를 붙잡는 건 이야기다. 그는 “똑같은 AI 모델과 대본을 사용하더라도 어떤 팀이 만드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며 “콘텐츠와 AI 둘 다 이해하는 팀이 승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넷숏은 현재 약 20개 언어로 콘텐츠를 공급한다. 번역과 더빙에도 AI를 쓴다. 최근에는 해외에서 AI 애니메이션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 분야도 확대하고 있다.
리는 “훌륭한 지식재산(IP)을 보유한 곳, 현지 제작 역량과 네트워크를 가진 곳들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한국 시장에서 현지화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
배경·액션만 AI…"배우 있어야 진짜 감동"
AI는 해외 로케이션의 문턱도 낮추고 있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가 원더 프로젝트와 만든 시리즈 ‘하우스 오브 데이비드’가 대표적이다. 시즌1에 사용된 시각효과 장면 850개 가운데 73개는 생성형 AI를 활용했다. 실제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이들을 둘러싼 하늘과 산악 지형 등 일부 배경을 AI로 만들어 제작 부담을 줄였다.
국내에서도 기존 촬영 방식에 AI를 결합하는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KT스튜디오지니가 제작한 '무신귀환록'은 배우들의 연기는 살리면서도, 실제 촬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액션을 AI로 만들었다. 배우의 연기와 AI 영상을 잘 버무리기 위해 AI에 최적화된 촬영 환경인 '그리드월'도 도입했다. 배우의 얼굴과 전신, 의상, 소품 등을 여러 각도로 찍어 ‘캐릭터 시트’를 만들었다. 여기에 AI로 생성한 환경과 무술 콘티 등을 결합해 액션 장면을 완성했다.
은재현 KT스튜디오지니 AI사업추진팀 팀장은 BCWW에서 "제작비 절감이 아닌 실제 구현하기 어려운 액션을 만들기 위해 AI를 활용했다"며 "카메라 촬영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액션을 구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AI는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 인간의 창작 도구가 될 것인가. 콘텐츠 시장에서는 두 방향의 실험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은 팀장은 후자에 무게를 둔 듯하다. 그는 "진짜 감동"을 강조했다. "AI가 창작자, 연출, 배우 등 기존 창작 요소들과 함께 작동할 때 관객에게 진짜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어요. 영혼이 담긴 연기를 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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