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 논설고문]
내년 청년 관련 예산은 43조3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청년의 취업기회를 늘리기 위해 일 경험 예산을 늘렸고 기업에 주는 청년 채용 장려금을 확대했다. 자산 형성을 돕기 위해 청년 대상의 적금 상품을 도입했고 세금 혜택도 늘렸다. 청년층이 겪는 고충을 헤아려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망라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전례 없는 규모로 예산을 늘렸으니 청년층이 환영해야 하는데 반응은 시큰둥하다. 관심과 배려에 고마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는 분위기다. 미취업 청년 5명 중 1명이 3년 이상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한 ‘장기 백수’ 상태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이 40%로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는데 20대에선 부정평가(51%)가 긍정평가(25%)를 두배 이상 앞질렀다. 다른 조사에서도 지지율이 가장 낮은 연령대는 어김없이 20, 30대다. 정부가 청년정책을 전담하는 청년미래비서관을 신설하고 청년층과의 소통을 늘리려 애쓰고 있지만 청년들의 마음은 풀리지 않고 있다.
청년세대와 나이 차가 크지 않다는 점을 빼고는 접점을 찾기 힘든 1990년생 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가 2030 여성들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만 냈다. 청년층이 중시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공정(公正)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청년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공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청년 실업이 최악의 상황에 빠지면서 청년들의 정서는 분노에서 시작해 냉소를 거쳐 체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분노와 냉소, 체념을 만들어낸 것은 정책을 입안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결정권을 가진 앞 세대 지도층이다.
청년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킨 폐(廢) 버스와 고시원 욕조, 빌라 대출 논란은 일자리가 없어 좌절하는 청년들을 더 화나게 했다.
버려진 버스를 개조해 집 없는 청년들의 주거공간으로 쓰자는 여당 의원의 제안엔 청년의 행복 추구권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기성세대의 오만함이 깔려 있다. 버스에서 살아야 하는 청년과 그런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제 한몸 간신히 누일 정도로 좁은 고시원에 욕조를 놓게 해준다는 행정예고는 청년의 열악한 주거 현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고시원에 욕조를 설치할 게 아니라 고시원보다 나은 곳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은 헌법이 보장한 주거권에 근거한 정당한 항변이다.
빌라 대출 확대는 청년 주거 지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비싼 아파트는 꿈꾸지 말고 빌라에 만족하라는 거냐’는 반발을 불렀다. 앞 세대는 은행 대출을 지렛대 삼아 아파트를 매입하고 평수를 늘려가면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뒀는데 청년에게는 자산 형성의 기회를 원천 봉쇄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청년층이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취약계층’이 된 것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비자발적 실업자가 많기 때문이다. 60대 이상 고령층의 일자리는 늘었지만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28개월 연속 하락했다.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5.4%로 4년 만에 가장 높았다.
청년 예산의 대규모 확충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획기적으로 늘릴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이 태어나서 자립할 때까지 취업, 주거, 자산 형성 등을 지원하는 종합대책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상당 부분은 영유아 시기를 포괄하는 평생복지에 가깝다. 태어나서 34세가 될 때까지 최대 2억원가량의 혜택을 제공한다는데 이 중 약 70%가 출산 지원금, 아동 기본수당, ‘우리 아이 자립펀드’ 같은 18세 이전의 현금성 지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단기 알바를 전전하거나 구직활동을 포기한 ‘쉬었음’ 청년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다. 생애주기별 복지를 청년 지원책으로 묶는 것이 행정에선 유능한 분류법일지 몰라도 혜택을 실감하지 못하는 정책 수요자에겐 숫자 부풀리기에 불과하다. 청년이 체감하지 못하고 효능감을 갖지 못하는 청년 정책은 냉소만 부를 뿐이다.
정부의 청년정책은 핵심을 짚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느낌이다. 청년의 문화생활을 권장하기 위해 영화 관람비 지원을 늘리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다수의 청년들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여가 활용이 아니라 독립과 미래 설계가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다.
청년에게 일자리는 주거를 결정하고 결혼과 출산을 결심하게 하는 삶의 기반이다. 소득이 적고 신분이 불안해 어쩔 수 없이 고시원을 찾고, 원하는 만큼의 대출을 받을 수 없으니 반지하, 원룸, 빌라의 월세를 전전한다. 청년 10명 중 7명이 ‘현재 교제 중인 이성이 없다’고 답하고, 미취업 청년 두명 중 한명이 번아웃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는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고용지표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청년층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기업의 경력직 선호로 취업 문턱이 높아진 데다 인공지능(AI) 열풍은 청년층이 선호하는 일자리부터 잠식하기 시작했다.
2022년 6월부터 4년간 청년 일자리 28만5000개가 줄었는데 이 중에서 26만8000개가 AI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에서 사라졌다. 청년들의 취업률이 높았던 지식서비스업, 출판업, 컴퓨터 프로그래밍·시스템 통합 관리업, 법률 ·회계·컨설팅 등이 포함된 전문 서비스업의 일자리 감소 폭이 유독 컸다. 자료 정리, 문서초안 작성 등 주로 신입사원이 맡았던 업무를 AI가 대체한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빅데이터가 유망하다고 해서 데이터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AI의 등장으로 애써 배운 것이 쓸모없게 됐다. 고도성장의 수혜를 누린 50대와 60대, 먼저 노동시장에 진입해 법적 보호를 받는 30대와 40대와 달리 20대 청년들은 AI 장벽에 막혀 출발부터 불리하다.
일시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시한부 공공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고령층엔 맞는 선택일지 몰라도 인생의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청년 고용 대책이 될 수는 없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저성장 세대로 불리는 1989~1998년생 2700명의 첫 일자리와 이후 10년간 경로를 추적한 결과 정규직에서 시작한 청년은 8년 3개월을 정규직·전일제로 근무했지만 비정규직으로 출발한 청년이 정규직으로 일한 기간은 3년 2개월에 그쳤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조가 노조원 신분과 권익보호에 주력하는 동안 비정규직 청년이 정규직 신분을 획득하는 사다리는 사실상 끊어진 상태다.
정부의 고용 정책은 상용직 채용으로 연결되지 않는 현금성 지원에서 벗어나 양질의 민간 일자리를 늘리는 쪽에 초점을 맞춰 재편해야 한다. 기업의 신규 채용에 방해가 되는 규제를 없애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취업의 물꼬를 터주는 것이 청년 고용을 늘릴 수 있는 확실한 처방이다.
지금 청년세대는 저성장 고착화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평균적으로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최초의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부(富)의 대물림’에서 소외된 다수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앞세대가 누린 경제적 풍요를 누릴 기회가 박탈된다.청년 고용 확대는 정책 우선순위의 문제인 동시에 공정의 원칙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부가 중장년층과 노년층 고용에 쏟는 관심을 청년층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할애해 세대 균형을 맞추는 것이 공정의 가치에 부합한다.
지금처럼 채용도, 해고도 어려운 경직된 노동시장에서는 청년들이 취업에 발을 디딜 공간이 갈수록 좁아진다. 최근 노사 협상의 핵심 이슈로 등장한 노조의 ‘임금 삭감 없는 정년 연장’ 요구는 사회적 약자인 청년들의 일자리 진입 통로를 더 좁힐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는 고용 문제를 놓고 사회적 분쟁이 생기면 노사정(勞使政) 대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선례를 쌓아왔다. 이 대통령이 양대 노총 위원장과 만나 근로자 정년연장 법안과 관련해 올해 안에 결과를 도출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고용 울타리 밖에 있는 청년들에겐 취업 사정을 더 악화시키는 뉴스로 받아들여진다.
청년은 노조 같은 대표성 있는 단체가 없지만 정년 연장 논의의 중요한 이해당사자다. 60세 이상 근로자의 소득 공백을 줄이고 노후를 안정시키는 것 못지않게 청년층의 에너지와 의욕을 담아낼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국가와 사회가 챙겨야 할 핵심 과제다. 정년 연장 법제화에 앞서 청년 고용을 위축시키지 않는 보완책부터 만드는 게 순서다.
고용의 세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정부와 노조, 중장년층과 청년층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세대간 대타협과 사회적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청년이 분노하고 냉소하며 체념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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