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환각을 봤던 쿠사마 야요이는 그 환각을 꺼내 세상에 내놓았을 뿐 아니라 무한 증식시키며 예술활동을 펼쳐냈다. 각종 경매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 중 한명이었던 쿠사마는 2026년 8월 14일 9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속의 기준으로 본다면 두 여성의 삶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마사코는 집안에서 몇 년을 감금되다시피 하며 은둔생활을 이어갔고, 쿠사마는 뉴욕과 일본을 오가며 환각에서 보았다는 이미지를 예술로 승화시켜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살았다.
이 두 여성이 몸 담았던 세계는 어떤 곳이었길래 이토록 달랐을까. 보통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듣는 그들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십수년만에 캠코더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토모아키 감독은 20여년에 걸쳐 자신의 가족을 영상에 담았다. 그 동안 누나 마사코의 병세는 점점 심해졌지만 누나에 대한 법적 권한이 없는 동생은 아무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 긴 세월 동안의 기록은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묵묵하게 이어졌다. 토모아키 감독이 가족의 기록물을 영화로 정리하며 마침내 붙인 제목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다.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조현병을 앓은 한 여성의 일생을 담았다기보다 어떤 가족의 한 생애를 담아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듯싶다. 80년대에 독일로 유학을 갈 정도로 유능했던 의사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마사코와 토모아키 남매는 여러모로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똑똑하고 야무진 마사코 역시 부모님을 따라 의대에 진학했지만 해부실습이 시작된 시점에 이상 증세를 보이며 이 가족의 역경이 시작된다. 이후 40여년에 걸쳐 마사코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 가족의 역사가 묵묵히 그려진다. 그 역사를 100여분에 압축해 지켜본 결과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했을까”다.
초기에 증상이 발현됐을 때 구급차를 타고 정신과까지 갔지만 아버지는 그 어떤 의료적 처방을 받지 않은 채 마사코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고 그 이후 무려 25년 동안 치료는 없었다. 도대체 왜 병원치료를 거부했느냐는 물음에 80년대 당시 거칠었던 정신병원의 현실을 지적하거나, 조현병 치료 약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등의 몇몇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이 두 사람의 세계에서는 딸의 정신병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불가능의 현상이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추측을 하게 된다. 마사코의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그대로 인정해버렸거나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믿음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부모님이 속해 있던 그들의 세계에서 마사코는 여전히 연구하기 좋아하는 똑똑한 딸이었다.
그렇다면 마사코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무엇보다 궁금한 그의 세계를 그가 이야기하는 엉뚱한 대답과 웅얼거림, 돌발적인 행동으로 가늠해보려고 애써봤으나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던 마사코의 세계는 아마도 태양과 달, 그리고 별에 가 닿아 있을 것으로 그저 추정만 할 뿐이다. 미지의 영역에 있으나 어쨌든 마사코에게는 존재하는 세계다. 이해할 수 없다면 다음 차례는 인정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채 20년을 넘게 한 가정을 묵묵히 이끌고 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실한 그 세계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 가족은 어떻게 해야 했을지 뾰족한 수가 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어쨌든 한 생애를 살아냈다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이 영화를 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쿠사마 야요이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이 작가의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그의 작품은 익숙했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에게 익숙할 정도면 세계적인 작가가 맞다. 온갖 외신과 국내 언론에서도 그의 죽음을 다뤘다. 그리고 그의 생애가 재조명됐다.
쿠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환각을 봤고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했다. 그런 그를 부모는 학대했고 방치해 역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쿠사마는 빨간 점무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환영을 본 후 그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노란 점박이 ‘호박’이다. 그리고 ‘무한의 거울방’이고 ‘소멸의 방’이며 ‘무한 그물’이다.
쿠사마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한하게 증식하는 점이다. 그는 이 상태를 ‘자기 소멸’이라 부르며 자신 내면의 상태를 무한하게 표출했다. 운이 좋게도 사람들은 쿠사마의 기괴해 보일 수 있는 그 이미지를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환호했다. 쿠사마의 세계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마사코와 쿠사마의 삶을 가른 것은 어쩌면 그 세계의 모양이나 당사자의 태도가 아니라, 그 세계가 세상과 만날 수 있었느냐의 차이였을 것이다. 마사코의 세계가 좀 더 일찍 드러났더라면. 그의 동생 토모아키 감독은 이 영화를 내놓으며 “결국 문제를 숨기는 방식은 해결을 늦출 뿐이고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어떤 세계는 뒤늦게 집 밖으로 나와 세상에 비로소 드러났으나, 어떤 세계는 일찌감치 외부로 표출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떤 것이 더 좋고 어떤 것이 더 나쁘고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타인의 세계를 대하는 또다른 타인의 세계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지, 그 지점을 고민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세계. 그 세계는 주변 환경·인물을 포함한 물리적인 세계와 더불어 그의 머릿속·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정신적·심리적 세계가 합쳐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후자, 정신의 세계를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충분히 개인 스스로 통제하여 사회화시킬 수 있다고 쉽게 단정한다.
불행은 거기에서 비롯한다.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니 이해할 순 없어도 인정할 수 있으려면 그 정신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것.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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