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주인공의 얼굴만큼은 대부분의 사람들 기억 속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정도로 강렬했던 프랭크-N-퍼터 박사의 독보적인 비주얼은 이 작품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컬트영화의 상징인 얼굴이 되었다.
대체 불가능한 이 압도적 캐릭터, 프랭크-N-퍼터 박사의 얼굴은 바로 배우 팀 커리의 것이다.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얼굴만큼은 보기만 하면 기억해낼 정도로 선명하다. 그런 팀 커리가 지난 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팀 커리의 상징적 얼굴은 프랭크 박사뿐만이 아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을 원작으로 한 1990년 미국 ABC의 2부작 드라마 ‘피의 삐에로’에서 페니와이즈로 등장한 그의 얼굴은 삐에로의 상징이기도 하다. 훗날 영화 ‘그것’에서 동일한 역을 맡은 빌 스카스가드가 빼어난 연기로 역할을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팀 커리의 페니와이즈를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평이 항상 따라붙었다.
팀 커리는 평생 수많은 역할을 맡았지만, 결국 대중의 기억에 남은 것은 몇 개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배우가 사라진 뒤에도 스크린에서 계속 살아간다.
그런 배우가 또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속 히스 레저다. 이 영화에서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는 얼굴 전체를 하얗게 칠하고 찢어진 빨간 입술을 한 채 등장했다. 혀를 날름거리는 기괴한 습관이 더해져 기념비적인 조커를 만들었다.
히스 레저가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은 ‘다크 나이트’가 개봉하기 전인 2008년이었다. 영화가 공개됐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은 조커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레저는 이 역할로 사후에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그의 조커는 이후 등장한 수많은 빌런들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처럼 남았다.
로빈 윌리엄스는 정반대의 얼굴을 남겼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그가 연기한 존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책상 위에 올라 서서 교실을 바라보게 하고, 시를 외우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키팅이 학교를 떠나게 됐을 때 학생들은 하나둘 책상 위로 올라서며 그를 배웅한다. 그 유명한 대사, “오 캡틴, 마이 캡틴”이 나오는 장면이다. 이 때 학생을 올려다 보며 말 없이 웃는 키팅의 얼굴, 아마 로빈 윌리엄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얼굴일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 장면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이 떠나는 선생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인 동시에, 스크린을 떠난 배우에게 관객들이 보내는 작별인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로빈 윌리엄스는 평생 사람들을 웃게 만든 배우였지만, 정작 그의 죽음 뒤에 가장 오래 남은 얼굴은 키팅 선생의 고요하고 온화한 얼굴이다.
한국에도 이런 얼굴이 있다. 지난 2023년 9월 췌장암 투병 끝에 작고한 배우 변희봉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변희봉이 연기한 박희봉 캐릭터는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다 큰 가족을 걱정하는 아버지다.
중학생 딸을 둔 아빠가 돼서도 어딘가 모자라기만한 아들을 끝내 두둔해주고, ‘새끼 잃은 부모 속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다정한 아버지 박희봉. 이 아버지는 괴물과 맞서는 과정에서 그 모자란 아들 때문에 느닷없이 목숨을 잃는데 그때 마지막 표정이 이 작품에서 백미로 꼽힌다.
원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덤덤한 손짓. 먼저 도망가라고 자식들을 향해 처연하게 손을 휘저으며 변희봉은 온전히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거기 서 있었다. 한국 영화가 만들어낸 수많은 아버지 가운데 영화 ‘괴물’에서 변희봉의 얼굴은 그 대표격으로 관객에게 각인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우 안성기가 있다. 안성기의 경우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특정한 한 캐릭터의 얼굴이 기억된다기보다 한국 영화의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얼굴에 가깝기 때문이다.
1957년 아역배우로 데뷔해서 평생을 배우로 살았던 그는 오랫동안 한국 관객에게 가장 익숙한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작품에서든 안성기가 등장하면 관객은 그 얼굴을 알아봤다.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얼굴이었다.
100편도 넘는 필모그래피를 남긴 안성기의 수많은 얼굴 중에서 그래도 기억에 남는 얼굴 하나 정도는 얘기해보고 싶다. 아마 관객에 따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배우 안성기의 얼굴이 많이 다를 지도 모른다.
필자는 2006년작 ‘라디오스타’와 1989년작 ‘개그맨’ 두 작품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개그맨’ 속 스타를 꿈꾸는 삼류개그맨의 얼굴을 꼽겠다. 아주 어렸을 때 ‘방화’라는 이름으로 한국영화를 TV에서 종종 틀어주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영화 ‘개그맨’이 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삼류개그맨 이종세를 연기했다. 어딘가 어설프지만 짠하고, 해맑은데 쓸쓸한 그 얼굴. 그 표정이 TV를 보던 그 당시의 어린 친구에게도 뭔가를 전달했나보다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받아낸 얼굴. 그렇게 한국 영화의 수많은 순간을 자신의 얼굴에 저장해 놓은 배우 안성기는 2026년 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결국 배우가 남기는 것은 필모그래피만이 아닌 것 같다. 수십 편의 작품 제목보다 어떤 한 장면, 어떤 한 표정, 어떤 한 목소리가 훨씬 오래 살아남기도 한다. 팀 커리의 프랭크 박사, 히스 레저의 조커, 로빈 윌리엄스의 키팅 선생, 변희봉의 박희봉, 그리고 안성기의 수많은 얼굴들처럼 말이다.
배우는 이 세상과 이별을 고했으나 그 배우의 얼굴은 우리의 기억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로 굳어진다. 그리고 영화가 다시 소환될 때마다, 특정 장면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 얼굴은 다시 생생히 살아나 그 배우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잊게 한다.
관객의 기억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은 배우에게 주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숙명이 아닐까 한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등장하는 것.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얼굴. 배우는 죽어도, 배우가 남긴 얼굴은 우리 곁에 계속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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