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의 이준 열사 이야기 | 인간·문화·자연] 헤이그의 손, 수유리의 아침

  • 순국 120주년을 한 해 앞두고 다시 만난 이준

  • 세계를 향해 자주독립을 외친 독립운동의 선구자

2026년 8월 23일 일요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 열사 묘역에 네덜란드 헤이그 시장 얀 반 자넨이 섰다. 방한 첫 공식 일정이었다. 강윤진 국가보훈부 차관이 그를 맞아 함께 참배했다. 119년 전 대한제국의 한 외교특사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갔던 도시의 시장이 한 세기를 훌쩍 넘어 그 특사가 잠든 서울의 묘역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이번 참배는 이준 열사 순국 12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열사의 뜻을 기리고 한국과 네덜란드의 역사적 유대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이날 참배에는 조승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남부지방산림청장을 지내고 4·19 민주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은 전진표 임우연합회장,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과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낸 주광일 시인 등이 함께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살아온 원로들이 119년 전 국권을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쓰러진 선열 앞에 나란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헌신의 계보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역사는 죽은 사람들의 기록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먼저 간 이들의 뜻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가느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조차 장충단공원에 있는 이준 열사의 동상은 알고 있어도 정작 수유리 묘역을 직접 찾아본 경험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은 또 얼마나 이곳을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은 곧바로 또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의 역사를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넘어, 그 역사를 다음 세대와 세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과 재산, 청춘과 목숨을 내놓았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구한말 국권회복운동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광복에 이르는 길에는 역사책에 크게 기록된 영웅들도 있었지만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수많은 작은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의 피와 눈물, 희생과 헌신이 모여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강을 이루었다.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을 기억한다.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고 윤봉길 의사를 기억한다. 김구는 중국 대륙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민족사의 큰 별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지도를 중국 대륙에만 펼쳐놓고 바라본다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독립운동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길이 있었다. 세계를 향해 나가는 길, 외교와 국제여론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는 길이었다.

1907년 헤이그로 향한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특사가 바로 그 길을 걸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약했다. 군사력으로 일본과 대결하기 어려웠고 외교권마저 빼앗긴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라의 주권까지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세 사람을 특사로 보냈다.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와 국민의 뜻에 반하여 강제로 체결됐음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세 특사는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냉혹한 국제정치 속에서 본회의 참석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실패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국제 언론과 접촉하며 한국이 처한 현실을 알렸고, 작은 나라 대한제국에도 자신의 주권을 지키려는 의지와 외교적 목소리가 살아 있음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들은 대한민국 글로벌 독립외교의 선구자들이었다. 총이 아니라 문서를 들었다. 폭탄 대신 국제법과 외교, 세계 여론을 들었다. 그들의 전장은 한반도나 만주, 중국 대륙이 아니라 유럽의 국제외교 무대였다. 나라의 힘은 약했지만 정신까지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살아 있으며 주권은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세계를 향해 외쳤다. 그 중심에 이준이 있었다.
 

지난 23일 네덜란드 헤이그 시장 얀 반 자넨이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소재한 이준 열사 묘역을 참배했다 사진 우측편  왼쪽에서 첫 번째 강윤진 국가보훈부차관두번째 판자넌 헤이그시장네번째 주광일시인여섯번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자문위원 사진 좌측편의 오른쪽 첫 번째 조승현 기념사업회이사장
지난 23일 네덜란드 헤이그 시장 얀 반 자넨이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소재한 이준 열사 묘역을 참배했다. 사진 우측편 왼쪽에서 첫 번째 강윤진 국가보훈부차관, 두번째 얀 반 자넨 헤이그시장, 네번째 주광일 시인, 여섯번째 김창순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자문위원. 사진 좌측편의 오른쪽 첫 번째 조승현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준은 본래 법률가였다. 1895년 법관양성소 제1회로 입학해 이듬해 졸업한 뒤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됐다. 근대적 사법제도가 막 태동하던 시절의 선구적인 법조인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울자 법정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육과 계몽,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고종 황제의 특사가 되어 헤이그로 향했다.

1907년 7월 14일, 그는 헤이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올 나라가 없었다. 헤이그에 묻힌 이준 열사가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무려 56년 뒤인 1963년이었다. 그해 10월 4일 유해 봉환식이 거행됐고 마침내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한 인간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 56년이 걸렸다. 그 긴 56년에는 망국과 식민지배, 광복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고단한 현대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래서 수유리 이준 열사 묘역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세계사와 만나는 현장이다. 서울과 헤이그가 만나고, 1907년과 2026년이 만나며, 나라를 빼앗기던 대한제국과 세계적인 경제·문화 국가로 성장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나는 곳이다. 이준 열사 묘소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고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장소로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 귀중한 역사 자산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고 있느냐는 데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살아 있는 역사교실이자 글로벌 학습의 현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역사는 교과서 속에서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이 직접 이곳에 와서 이준을 만나고 이상설과 이위종을 배우며, 을사늑약이 무엇이었고 왜 세 사람이 지구 반대편 헤이그까지 가야 했는지를 토론하도록 해야 한다.

이준 열사의 이야기는 국내용 애국교육에만 머물 소재도 아니다. 국제법과 외교, 국가주권과 평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부할 수 있는 세계시민교육의 훌륭한 교재다. 더구나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가 순국한 건물에 이준열사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수유리와 헤이그를 하나의 역사교육 네트워크로 연결한다면 서울의 청소년이 헤이그를 배우고 네덜란드의 청소년이 대한제국의 역사를 배우는 진정한 글로벌 역사교육이 가능하다.

수유리에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 현대사가 살아 있다. 4·19다. 1960년 독재에 항거해 학생과 시민이 일어났던 4·19혁명의 역사와 멀지 않은 곳에, 1907년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세계를 향해 절규했던 이준 열사가 잠들어 있다. 이 두 역사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07년 이준이 외친 것이 주권이었다면 1960년 4·19가 외친 것은 민주주의였다. 시대는 달랐지만 뿌리는 같다.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누가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4·19민주묘지와 이준 열사 묘역, 그리고 수유리 일대의 독립·민주 관련 역사유산을 하나로 연결해 ‘대한민국 자유·독립·민주주의 역사벨트’로 발전시켜 볼 만하다. 여기에 북한산이라는 서울의 대표적 자연유산을 더한다면 인간과 문화와 자연이 만나는 서울의 새로운 역사·인문 관광축을 만들 수 있다. 청소년은 하루를 걸으며 독립과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외국인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국권상실과 식민지배, 전쟁과 독재를 넘어 오늘의 자유민주국가로 성장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7년 7월 14일이면 이준 열사 순국 120주년을 맞는다. 120주년을 추모식 한 번으로 보내서는 너무 아깝다. 서울과 헤이그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열고, 한국과 네덜란드 청소년이 함께하는 ‘이준 글로벌 평화캠프’를 만들며, 헤이그 특사의 이동 경로를 디지털 지도와 AI 콘텐츠로 복원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추모를 교육으로, 교육을 문화로, 문화를 세계와의 교류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세계적 경제·문화 국가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선열을 기리는 21세기적 방식이다.

그러나 참배 현장에서 알려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어려운 형편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사람의 뜻을 이어가는 일이 특정 개인의 사비와 헌신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그 현실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것은 과거를 숭배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고 다음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가르치는 일이다.

국가보훈부와 서울시, 강북구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교육부와 교육청도 이곳을 청소년 역사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훈에는 여야가 있을 수 없으며 독립운동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순국선열을 기억하는 일만큼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국가적 과제로 다뤄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 경제계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기업들이 세계 곳곳에서 사업을 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 어디에서나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토대에는 선대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되찾은 나라와 주권이 있다. 이제 대한민국 기업들도 경제적 성공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 정신적 유산을 지키는 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업이 이준 열사 청소년 글로벌 교육사업을 후원하고, 서울과 헤이그의 청소년 교류를 돕고, 다국어 디지털 기념관과 역사 콘텐츠 구축에 힘을 보탠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신적 자본과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다.

2026년 8월 23일 수유리에서는 상징적인 장면이 만들어졌다. 119년 전 이준이 목숨을 걸고 찾아갔던 도시 헤이그의 시장이 119년 뒤 서울로 찾아와 이준의 묘 앞에 머리를 숙였다. 마치 1907년 대한제국이 헤이그를 향해 내밀었던 손을 2026년 헤이그가 다시 잡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주광일 시인과 환담하는 얀 판자넌 헤이그 시장
주광일 시인과 환담하는 얀 반 자넨 헤이그시장



헤이그의 손, 수유리의 아침.

우리는 경제대국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K-컬처는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이제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이 어떻게 나라를 잃었으며, 어떻게 다시 나라를 찾았는가도 제대로 이야기할 때가 됐다. 그 이야기에는 김구가 있어야 하고 안중근과 윤봉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상설과 이준과 이위종도 있어야 한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독립투쟁과 함께 헤이그와 연해주, 미주와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 독립외교의 역사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수유리 이준 열사 묘역에는 더 많은 청소년이 찾아와야 한다. 기업인들도 와야 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들도 와야 한다. 그리고 서울을 찾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1907년 작은 나라 대한제국이 세계를 향해 외쳤던 절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라가 약했다고 정신까지 약했던 것은 아니다.

이준은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2027년 순국 120주년은 한 열사를 다시 기억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준을 통해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세계사의 무대 위에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나서고 경제계가 힘을 보태며 정치권이 여야를 넘어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이 찾아가야 한다.

순국선열을 가장 잘 기리는 방법은 거대한 비석을 하나 더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가치가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다.

119년 전 헤이그에서 꺼져간 한 사람의 생명이 오늘 수유리에서 다시 묻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자유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대한민국을 물려줄 것인가.

이제 대한민국이 대답할 차례다.



◆이준 열사, 그는 누구인가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대한제국의 법률가이자 교육·계몽운동가, 국권회복운동가이며 헤이그 특사다.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조인 양성기관인 법관양성소 제1회로 입학해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용된 한국 근대 사법제도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강직한 성품으로 부패와 불의에 맞섰으며, 국권이 흔들리자 법조인의 길에 머물지 않고 애국계몽과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대한보안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교육을 통한 구국에도 힘썼다. 사재를 들여 보광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과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와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07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다. 세 특사는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다. 일본 등의 방해와 당시 국제정치의 벽으로 본회의 참석은 이루지 못했지만 국제 언론 등을 상대로 대한제국의 현실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준 열사는 그 과정에서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순국 56년 만인 1963년 조국으로 봉환돼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정부는 이에 앞서 1962년 이준 열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현재 수유리의 이준 묘소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으며,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이준의 역사적 의미는 그의 세 얼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법과 정의를 세우려 했던 법률가, 교육으로 나라를 살리려 했던 교육자, 국제사회에 대한의 독립을 호소했던 외교독립운동가였다. 총칼이 아니라 법과 외교, 국제여론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대한민국 글로벌 독립외교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헤이그는 그의 순국지이고 수유리는 그의 귀향지다. 이제 수유리는 한 애국자의 무덤에 머물지 않고 대한민국 청소년과 세계인이 자유·주권·정의·평화를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교실이 되어야 한다.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이준 열사 묘역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이준 열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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