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 칼럼] 한반도 질서의 재설계: 한국이 움직여야 판이 바뀐다.

김영윤
김영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들이는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북한의 핵 보유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면서도 과거와 같은 강도 높은 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고 있다. 작전 중인 한미연합훈련(UFS)을 전격적으로 축소·중단하였는가 하면 김정은 위원장과의 개별적인 친밀성도 거듭 부각하고 있다. 이러한 행보는 트럼프 행정부가 북·미 회담 자체에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다가오는 11월 중국 선전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한반도 정세는 다시 한번 급격한 변곡점을 마주하고 있다. 오는 9월 말 워싱턴에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 역시 양국 간 외교적 조율 가능성과 함께 북·미 대화가 단순한 양자 이벤트를 넘어 동아시아 질서의 구조적 재편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진핑 주석의 미국 방문은 미·중 관계가 전면적 충돌에서 부분적 안정화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중 관계가 완화되면 중국은 북핵 문제를 전략적 카드로 과도하게 사용할 필요가 줄어들고, 미국은 중국의 협조를 얻어 북한을 회담장으로 유도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중국은 북·미 회담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북·미 긴장이 완화하면 중국의 동북 지역 경제·안보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 다만 중국이 경계하는 것은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이 배제된 채 미국과 북한 간에 독자적 빅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북·미 회담을 지지하되 미·중 관계 관리의 틀 안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북한의 계산은 독자적이고 현실적이다. 최근 연이은 미사일 발사는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몸값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읽힌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 자체에는 호감을 보이면서도 하노이 회담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만큼 사전에 체제 안전 보장에 준하는 조건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여기에는 핵보유국 지위의 사실상 묵인, 대북 제재 일부 완화 및 한미연합훈련의 중단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정상회담을 위한 북·미 간 실무 접촉이 본궤도에 오르면 미국은 핵·미사일 시험 유예 또는 일부 시설 동결을 대가로 대북 제재의 일부 완화, 인도적 지원이나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공동 의지 천명과 함께 북·미 간 대화 재개 및 상호 존중 등이 천명될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이다. 북·미 대화의 과정에서 한국은 어떤 역할과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북한은 여전히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접 거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미·중 정상회담 등 외부 변수가 북·미 대화의 환경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시진핑에게 북한의 대화 유도를 위한 중국의 역할을 요청하고 북한이 이에 호응한다면 한국의 외교적 입지는 극도로 좁아진다. 지금 한국이 외교의 다변화와 동시에 능동적 개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한국이 한반도 질서의 설계자로 복귀하기 위해 추진해야 할 세 가지 실질적 외교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미 정상회담이 다른 지역이 아닌 북한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외교적 환경을 미국과 중국을 통해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성사된다면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인민들에게 주는 최고의 정치적 선물이 될 수 있다. 북한 내부 결속 강화는 물론 체제 안정과 국제적 위상 상승 등 북한이 원하는 많은 요소가 충족된다. 북한은 남북 관계에서도 유연하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역할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조율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 대중 및 대러 관계의 적극적 재조정도 필요하다. 중국과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협력 기조를 다지되 한국의 독자적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아울러 북핵 문제의 주요 행위자인 러시아와도 교통·에너지·물류 분야의 채널을 복원하여 향후 4자 회담 등 다자적 평화 프로세스에서 발언권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을 선제적으로 비축할 필요가 있다.
 
셋째, 외교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실질적 전략 마련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대미 자주 외교’ 확보가 중요하다. 북한은 한국을 ‘미국의 종속 변수’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남북 관계의 독자적 동력은 살아나기 힘들다.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파급력 있는 조치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다. 전작권 환수는 단순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이 ‘독자적 안보·외교 주체’라는 메시지를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각인시키는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미 전작권 환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미국과 긴밀하게 조율하면서 조속히 환수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향후 북한 핵 문제를 비롯해 한미연합군사훈련 등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주도권을 살려야 한다. 지금 한국이 외교적 주도권을 되찾지 못한다면 한반도 문제는 다시 ‘한국 없는 합의’로 굳어질 위험이 크다. 미·중 정상회담과 북·미 회담이 동시에 추진되는 이 시점이 한국에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이 스스로 그 존재감을 증명하지 못하면 북한도 미국도 한국을 협상 테이블의 필수 행위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주도다. 트럼프의 북한 방문 지원, 대중·대러 외교 재조정, 전작권 환수 등은 모두 한국이 한반도 질서의 설계자(Designer)로 복귀하기 위한 실질적 행동이다. 지금 이 창을 열지 못하면 한반도 문제는 다시 주변 강대국의 전략적 계산 속으로 흡수될 것이다.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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