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국내에서 국내법이 존재하듯이 국제사회에서는 국제법이 통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은 공기와 같은 존재여서 있을 때는 그 가치를 모르다가 희박해지면 갑자기 혼란을 느끼게 된다. 국제법이 없으면 평화가 당연하지 않고 국제사회는 미국의 서부개척 당시와 같은 무법사회가 된다. 강한 자는 마음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희생당하거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한다.
국제법은 17세기 초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 더 융성해지면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2차 대전 후 미국이 패권국이 되면서 국제법 체계를 세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국은 체계를 세울 뿐만 아니라 국제법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제법이 잘 유지되도록 이끌었다.
국제법은 국내법과 같은 견고성과 강제력을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법체계이다. 미국 정치학자 한스 모르겐소는 ‘국제정치에서 국제법은 국가들의 국익과 권력을 추구하려는 현실 앞에서 무력해지기 쉽다.’라며 국제법의 태생적 취약성을 지적했다. 강대국이 국제법을 무시할 때 이를 막을 상위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 강대국이 마음대로 할 경우 그 정당성에 대해 비난을 가할 수 있는 도덕적 준거를 제공하는 정도만 국제법이 할 수 있다. 유엔 초기에는 국제법에 강제 집행력을 부여하기 위해 유엔군을 창설할 권한까지 두었다. 이후 냉전으로 인해 안보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침략자를 막을 유엔군을 더는 창설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 때 창설된 유엔군만 유일하게 존속하고 있다.
국제법은 1618년 베스트팔렌 전쟁 이후 근대 주권국가들이 등장하면서 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체계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가간 관계를 규율하는 외교와 영사에 관한 법체계가 형성되었고 다음에 전쟁과 인도주의에 관한 법체계 만들어졌다, 그 후 국가 간 상거래를 규율하는 교역법 등 다자간 국제법 체계가 등장하였고 동시에 양 국가 간 동맹이나 국경 구획을 정하는 조약이 많아짐으로써 양자간 법체계도 발전하였다.
국제법은 국내법과 같이 입법기관이 존재해 체계적으로 법체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들이 주요국가 중심으로 쌓이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관행이 규범이 되고 규범이 법규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국제법이 발전했다. 그래서 ‘국제법은 강대국이 지나간 발자취’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정글 숲에 코끼리가 자주 다니면 길이 나듯이 강대국들이 다니던 길을 다른 나라들이 따르면서 그 길을 국제법이라 인정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미국 주도로 국제기구들이 생기고 유엔을 비롯한 각 국제기구에서 회원국간 합의에 의해 새로운 규범을 생성하면서 국제법의 분야와 내용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강대국들도 편의에 따라 준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 법으로 여겼다. 국제법에 강제력, 즉, 벌칙이 부여되기 시작하면서 강행규범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발전과정을 거친 국제법 체계가 지금 큰 도전을 받아 흔들리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국제법의 강제 집행력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이미 G-2의 한 축이 된 중국이 이 국제법 체계를 사실상 부정하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관점에서는 국제법, 즉 만국공법이라는 법체계는 서양의 산물이고 특히 제국주의 강국들 주도로 만들어진 법체계라고 여긴다. 따라서 현 국제법 체계에 대해 부정적이며, 향후 중국 중심의 법체계를 만들 생각이기에 현 국제법의 미래는 불안하다.
미국이 최근 앞장서 허물고 있는 국제법의 사례로는 ‘주권 존중의 원칙’, ‘영토 불가침의 원칙’, ‘조약의무 준수의 원칙’ 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원칙들은 성문 국제법이 형성되기 전부터 서양의 근대국가 간에 관습법으로 정착된 후 오랜 세월 지켜져 왔다. 년초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침공하여 자국법에 의거해 타국 대통령인 마두로를 체포,압송하였다. 이후 미국 법정에서 그를 사법처리함으로써 주권존중이라는 국제법의 대원칙을 부정하였다. 트럼프는 그린란드와 파나마 등 세계 요충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영토 불가침의 원칙을 또한 부정하고 있다.
미국은 또한 한국, 캐나다, 멕시코 등과 맺은 FTA를 비롯한 양자조약과 파리 기후협약과 같은 다자협약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탈퇴해 버렸다. 이는 조약 당사국으로서 조약이행 의무를 무시하는 처사로 국제법의 안정성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국제법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합의 위에 성립되는데 이를 파괴한 것이다.
미국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국제법의 대원칙인 ‘자의적 무력사용 금지의 원칙’과 불가피하게 전쟁을 시작할 경우 ‘선전포고 우선 원칙’을 무시하고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마약 카르텔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공해상에서 타국의 인명과 선박을 공격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아 처벌할 수도 없다. 미국 국익에는 맞는지 몰라도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다. ‘만국공법이 대포만 못하다’라는 유묵을 안중근 의사가 100여년 전에 남겼는데 다시 그 시대가 돌아오고 있다.
이란도 전쟁법상 중립국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면서 걸프 지역 미국 동맹국이나 미군 주둔국에 대해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 걸프 국가들은 교전행위에 참여하지 않아 중립국인데도 교전 당사국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가자지구에서 사실상 국제법을 무시하고 인종청소를 하고 있다. 미국이 법을 무시하니 다른 나라도 무시하는 것이다.
중국도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이 인정될 수 없다는 해양중재 재판소의 2016년 판결을 부정하고 남중국해를 내해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란이 호루무즈 해협 등 국제 해양 운송로에 통행료를 부과할 경우 중국도 대만해협 등을 사유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제법 형성 단계와 마찬가지로 강대국들이 보인 선례를 다른 국가가 모방하게 되면 정글 속 있던 길이 없어지면서 국제법 체계는 더욱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면 국제사회는 다시 정글의 시대, 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국처럼 개방된 자유국제 질서와 안정된 국제법 속에 성장해 온 중견국가들은 국제법 체계의 붕괴로 가장 피해를 보는 국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다른 중견국가들과 연대하여 전개해야 한다. 현 국제법 체계를 수호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부합한다.
국제법의 동요가 지속된다면 북한이 우리에게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을 감행해도 유엔사가 다시 가동되지 않으면 달리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다. 또한 호루르즈 해협과 말래카 해협, 대만해협에 통행료가 부과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수입물가가 폭등하여 한국 경제는 괴멸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
독도와 이어도 등을 주변국들이 임의로 침탈해도 국제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면 전쟁으로 되찾거나 뺏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각국이 한국 기업과 거래를 한 후 대금지불을 하지 않거나 우리 기업들을 국유화해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피해가 눈덩이처럼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들이라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현실로 닥칠 가능성이 있다. 국제법이라는 빈집에 유리창이 한번 깨어지면 폐가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에 대해 우리 힘을 키워 스스로 지키고 또 찾아올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제법 체계 유지를 원하는 국가들과 손잡고 질서를 유린하는 국가들에게 공동대응할 필요도 있다. 국제해협이 막히는 것도 미국에 맡겨둘 것이 아니고 유럽, 한국등 이해 당사국들이 나서 문제해결에 힘을 보태야 한다. 남이 지켜주겠지 하고 믿다가 국제법이 허물어지면 우리가 최대 피해국이 될 것이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 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 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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