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말년에 그림을 그리면서 쏟아낸 에너지를 정원에서 보충하셨죠. 우두커니 앉아 계시곤 했어요."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골목 어귀에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도 그렇다. 작품으로 공간을 빼곡히 채우는 대신, 자연에 자리를 내줬다. 대지면적 약 230평의 자그마한 미술관 층층에 맑은 창을 냈다. 비워낸 자리에는 산의 푸름과 이웃집의 붉은 벽돌, 환한 빛이 들어왔다. 말년의 박서보(1931~2023) 화백이 정원에서 힘을 얻었듯, 그의 미술관도 자연의 에너지를 듬뿍 받았다.
오는 21일 개관을 앞두고 18일 찾은 박서보미술관은 연희동의 소소한 풍경에서 몸을 우두커니 낮췄다. 미술관 외벽을 감싼 바다와 하늘을 닮은 청색은 주변의 나무와 청기와, 멀리 안산의 숲과 어우러졌다. 맑은 창 너머로는 오래된 붉은 벽돌집과 회색 빌라, 낮은 건물이 보였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동네 풍경이 창 안으로 들어오자 한 폭의 그림이 됐다.
미술관은 박서보가 생전에 생활하고 작업했던 연희동 작업실 바로 옆에 자리한다. 최문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가 설계했다. 지하 2층~지상 3층, 연면적 약 2000㎡ 규모다. 전시실 3곳과 야외 정원 등이 있다.
미술관에는 박서보의 미술 세계와 그의 자연관이 응축됐다. 박서보를 잘 모르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박서보 작품 25점은 이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전시는 검은 한지 묘법에서 색채 한지 묘법으로, 그리고 빛을 머금은 맑은 물 같은 말년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돌, 이끼, 우리 자생 수종으로 채운 미술관의 자그마한 정원은 박서보 화백 작품 속 황토색과 거무스름한 아궁이색에서 피어난 듯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붉은색(묘법 No.100915)은 다가올 연희동의 가을을 기대하게 했고, 회백색(묘법 No. 230127)은 자연의 원천인 빛 혹은 겨울로 이끌었다. 작가가 생전 "손을 넣고 찌르면 무한대로 계속 들어가는 그런 느낌, 그것이 바로 자연"이라고 말한 것처럼, 무한대의 자연이 이어졌다.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여백이 있어야 비로소 새로운 것이 드러날 수 있다"는 흐엉 도딘의 언급처럼, 흐엉 도딘의 작품 17점 역시 자연스레 자리했다.
박승호 이사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개월 전에 만난 해외 작가가 흐엉 도딘"이라며 "말이 통하지 않았던 (두 작가는) 3시간 정도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작품과 세계관을 교환했다"고 회상했다.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여성 작가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도 작가 선정에 작용했다. 박 이사장은 "세상이 크게 바뀌는 이 시대에 재단이 할 수 있는 일, 또 그나마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라며 "그간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주목을 받았더라도 (유리)천장을 넘기 어려웠던 여성 작가를 제 위치에 올리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입장료는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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