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통상 파고가 다시 높아지는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 통상정책의 실무 사령탑이 공석이 됐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15일 직권면직되면서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곧바로 미국으로 향했다. 대미 투자와 무역법 301조 관세 등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이뤄진 긴급 방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여 전 본부장의 직권면직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통상 협상력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협상은 어느 때보다 민감한 국면에 들어섰다. 미국은 한국의 대미 투자 이행 속도를 문제 삼고 있고, 무역법 301조에 따른 추가 관세 위험도 남아 있다. 한국에는 이미 강제노동 관련 301조 관세 12.5%가 적용됐다. 이달 말에는 과잉생산 관련 301조 조사 결과 발표도 예상된다. 추가 관세가 현실화하면 한·미가 어렵게 구축한 15% 관세 상한이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통상 문제가 관세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이행에도 속도를 요구하고 있다. 투자 프로젝트 선정과 관세, 비관세 장벽, 공급망 재편 등 여러 현안이 동시에 맞물려 돌아가는 형국이다. 하나를 양보해 다른 하나를 얻는 전통적인 통상 협상보다 훨씬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통상교섭본부장 공백이 장기화해서는 안 된다. 통상 협상은 사람이 바뀐다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국 측과 쌓아온 협상 채널과 논리, 쟁점별 대응 시나리오가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한다. 산업부가 박정성 통상차관보를 중심으로 비상 업무 체계를 가동하기로 한 만큼 당장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후임 인선도 서둘러야 한다.
대미 투자 역시 속도에 쫓겨서는 곤란하다. 미국의 요구에 성의를 보이는 것은 필요하지만 3500억 달러는 우리 경제와 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규모다. 투자 대상의 사업성과 우리 기업의 참여, 국내 산업에 돌아오는 효과를 철저히 따져야 한다. 관세 압박을 피하기 위해 경제성이 떨어지는 사업까지 서둘러 결정한다면 당장의 불은 끌 수 있어도 더 큰 비용을 떠안을 수 있다.
정부 전체의 대응 체계도 다시 정비해야 한다. 산업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정·금융·외교 당국과 대통령실이 하나의 전략 아래 움직여야 한다. 관세와 투자를 따로 협상하지 말고 조선·반도체·에너지·공급망까지 포괄한 패키지 전략을 만들어 미국이 한국을 압박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협력해야 할 파트너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통상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상대의 압박보다 우리의 혼선이다. 실무 책임자의 갑작스러운 공백이 협상 전략의 공백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김 장관의 긴급 방미는 그 공백을 메우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정부는 조속히 통상 지휘체계를 정상화하고 미국에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두른 양보가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흔들리지 않는 협상력이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걸린 통상전선에는 단 하루의 공백도 허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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