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 논설고문]
수출이 6월에 사상 처음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7월까지 누적 수출액은 5952억 달러로 남은 5개월 동안 월평균 809억 달러를 수출하면 최초로 연간 1조 달러 기록을 세우게 된다.
수출이 증가하면서 올 상반기 경상수지 흑자는 1910억 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4배로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2위다.
수출과 경상수지가 호조를 보이면서 3%대 성장이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최고 3.8%까지 높였고 한국은행은 이달 중 3%대 성장 전망을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수준의 경제지표라면 일자리가 늘고 내수가 살아나고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러나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6.8%로 5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뛰었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자영업 연체율과 폐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성장률이 높아지는데 질 좋은 일자리가 늘지 않고, 국민소득이 증가하는데 중산층과 서민의 지갑은 얇아졌다. 숫자는 분명 호황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은 불황을 말한다. 지금과 같은 경제지표와 실물경제의 극심한 괴리는 한국 경제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파급 효과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정부가 경제 분야에서 이룬 실적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덕이 크지만 정부의 기민한 대응과 지원이 호재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2025년 상반기 0.3%까지 떨어졌던 성장률을 다음 해에 3%대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숫자만으로도 경이로운 성취다. 망가진 경제 시스템을 짧은 기간에 빠르게 복원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정부가 중장기 경제목표로 잠재성장률 3%, 수출 세계 4강,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의 ‘3·4·5 비전’을 제시한 것은 경제지표 반등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경제의 진짜 실력을 키우고(잠재성장률), 국부를 늘리고(수출), 민생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국민소득) 지표라는 점에서 도전해볼 만한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가 ‘474’(잠재성장률 4%, 고용률 70%,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이명박 정부가 ‘747’(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내세웠다가 실패한 것과 달리 이번엔 실현 가능성도 꽤 높아 보인다.
1%대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을 단기간에 3%까지 올리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도약기금을 활용한 3대 메가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진행되고 구조개혁이 병행되면 2%대로 높이는 것은 가능하다는 평가가 많다. 10년 넘게 떨어지기만 하던 잠재성장률을 상승세로 돌려놓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치적이 될 수 있다.
수출은 상반기 기준으로 세계 5위까지 오른 상태여서 연간 1조 달러를 넘기면 네덜란드를 제치고 4위가 된다. 국민소득 5만 달러의 변수는 원·달러 환율이지만 경상수지가 증가하고 환율 안정세가 지속되면 시기가 문제일 뿐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345 비전의 한계는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성장의 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성장률, 수출, 국민소득 같은 거시지표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일자리, 내수, 가계 수지, 가처분 소득처럼 체감도가 높은 항목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인상을 준다.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값이기에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면 5만 달러를 이뤄도 국민 다수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청년 일자리가 부족한 나라의 수출 세계 4강 구호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경제 운용에 이미 주름을 드리우기 시작한 지표와 체감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지가 345 비전 달성보다 먼저 풀어야 할 정부의 숙제다.
경제 성적표의 평균 점수는 크게 높아졌지만 개별 과목의 성적을 뜯어보면 과목 간 편차가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출과 경상수지, 성장률의 약진에도 민생과 직결되는 고용과 소비, 물가 등 생활 관련 지표는 부진하다. 수출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반도체와 비(非)반도체, 고부가가치 서비스업과 서민 밀착형 업종 간 격차가 반도체 특수(特需)와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격 상승을 거치면서 더 벌어지고 있다.
1분기 제조업 생산이 3.0% 증가해 5년 만에 최대 증가율을 기록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제조업 생산 증가율은 0.2%에 그쳤다. 서비스업에서 고부가가치 업종으로 분류되는 금융·보험업은 증시 활성화로 호황을 누리지만 숙박·음식점업과 소매 판매 경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에 일자리 가뭄이 겹친 3고(高) 1무(無)가 성장률 효과를 상쇄해 가계의 실질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소비 위축과 물가 상승, 고금리로 인한 이자 부담이 겹치면서 서민과 중산층은 경기 회복을 통계로만 접할 뿐이다.
성장률이 높아지면 일자리가 늘고, 기업의 실적이 좋아지면 내수경기가 살아나 경제 전체에 온기가 퍼진다는 경제상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중점적으로 챙기는 대기업 영역의 수출, 경상수지, 성장률 등 총량지표와 가계, 자영업자, 비정규직 근로자가 체감하는 실질임금, 주거비, 대출이자, 폐업률 등 미시지표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일각에서 경제지표의 호조가 통계상 착시(錯視)가 아닌지 의심하는 시각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경제지표와 실물경제의 괴리는 역대급 반등을 이끈 주역인 K자형 성장의 부작용이 커졌다는 증거다. 경기 회복의 과실이 반도체 관련 업종과 종사자, 자산시장에 집중되면서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가 확대되는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문제를 풀기 위한 처방은 경제상식을 배신할 정도로 심해진 괴리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격차를 좁혀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과도한 편중이 한국 경제에 양날의 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조금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는 업종 특성상 종사자가 적고 연관 산업의 범위가 좁아 취업 유발 및 생산 승수 효과가 크지 않다. 조선, 철강, 자동차 등 중후장대형 제조업과 많은 인력이 필요한 건설업에 비해 고용과 골목상권에 대한 기여도가 떨어진다.
반도체 일변도에서 벗어나 제조업 균형 발전과 기술력 강화를 통해 성장동력을 지금부터 다변화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큰 건설업에 대한 지원을 늘려 자생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건설, 지역 인프라, 중소 제조, 소매 등 생활 밀착형 분야가 살아나야 체감경기가 활력을 찾을 수 있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로 높이면서도 취업자 증가 전망치는 16만명에서 15만명으로 1만명 낮춰 잡았다. ‘성장 상향, 고용 하향’의 기묘한 조합으로 고용 없는 성장을 공식화한 셈이다. 인공지능(AI)의 확산 속에서 정부가 일자리 확대를 포기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언급한 것처럼 청년들은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취약계층으로 전락했다.구직 의욕을 잃은 ‘쉬었음’ 청년에 실업자와 취업준비생을 합친 청년 인구가 100만명을 훌쩍 넘는다.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청년들의 좌절을 키우는 고용 없는 성장의 고리를 시급히 끊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인 2024년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취지로 ‘먹사니즘’을 핵심 이념으로 강조했다.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경제 해결에 두자는 이 제언은 당시엔 사법리스크 논란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지표와 실물의 괴리가 심한 현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커졌다. 낙관적인 경제지표가 넘쳐나는 지금이 총량성 지표 관리 위주에서 일상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옮길 적기다.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성장은 아무리 수치가 높아도 반쪽 성장일 뿐이다.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민생을 개선하는 것이 경제 운용의 진정한 목표가 돼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역대급 경제지표의 성취는 빛바랜 훈장에 불과하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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