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

  • 제1부, 동경대에서 떠오른 질문…왜 지금 한일인가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제1부, 동경대에서 떠오른 질문…왜 지금 한일인가

오늘 필자가 30여 년 전 다녔던 일본 동경대학의 중앙도서관과 이에 이웃한 공학부 건물을 지나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름 햇살 아래 익숙한 캠퍼스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공간을 둘러싼 시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학생 시절 이곳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세계 경제의 중심 화두는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이었고, 미국은 정보통신 혁명의 문을 막 열기 시작한 시기였다. 반도체와 자동차, 공작기계와 소재기술은 일본 경제의 상징이었고, 한국은 그 뒤를 부지런히 따라가는 산업국가였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동경대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세계 산업의 질서는 완전히 바뀌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했고, AI Factory가 새로운 산업혁명의 상징이 되었으며,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로봇과 자율주행, 에너지와 소프트웨어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로 연결되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경쟁은 AI를 중심으로 한 산업 생태계 경쟁으로 확장되었고, 국가 경쟁력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질문은 단순했다.
"왜 지금 한국과 일본은 손을 잡고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과거를 잊자는 뜻도, 경쟁을 멈추자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AI 시대의 경쟁은 더 이상 한 나라가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GPU와 HBM,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전력과 통신망, 소재와 장비, 인재와 자본이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어야 비로소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산업은 점점 더 거대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그 플랫폼은 국경을 넘어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세계는 이미 새로운 산업동맹의 시대에 들어섰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동맹국들과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유럽은 반도체와 친환경 산업을 중심으로 전략적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중동은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AI 데이터센터와 첨단기술 투자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역시 거대한 시장과 인재를 기반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가장 가까운 경쟁자로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반도체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했고, 자동차에서도 세계 시장을 다투었으며, 디스플레이와 배터리에서도 선두를 놓고 겨루었다. 경쟁은 양국 산업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경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는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산업 전체를 연결하는 운영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가보다 누가 AI 기반의 모빌리티 생태계를 구축하는가가 중요해졌고, 누가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드는가보다 누가 AI Factory 전체를 설계하고 운영하는가가 승부를 좌우한다. 경쟁의 단위가 기업에서 산업 생태계로, 산업 생태계에서 국가 연합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상호보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은 속도가 강하다. 메모리 반도체와 AI 인프라 구축, 디지털 전환과 실행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산업화하고 시장으로 연결하는 능력 역시 탁월하다.

반면 일본은 깊이가 강하다. 정밀 제조, 산업용 로봇, 소재·부품·장비, 품질관리와 장수 기업의 노하우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산업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과 경험은 일본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다.

속도와 깊이. AI 시대가 요구하는 두 축을 한국과 일본이 각각 강점으로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는 이 두 강점이 경쟁 관계 속에서 소모되었다면, 앞으로는 서로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일 AI 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역사 문제와 정치적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며, 양국 국민의 감정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산업과 기술은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 공급망은 기다려주지 않고, AI 혁명은 어느 나라의 사정을 고려해 속도를 늦추지도 않는다. 선택을 미루는 동안 다른 국가들은 이미 새로운 동맹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동경대 캠퍼스를 걸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21세기 한일 관계의 핵심 질문은 과거처럼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다. 

새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한다면 세계는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AI 시대 동북아의 미래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전략 과제가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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