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AI에 길을 묻자 한국의 길이 보였다

  • AI 선도중견국으로 가기 위한 4가지 전략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정책과 메시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필자는 세 가지 키워드에 주목했다. 첫째는 'AI 3대 강국'이라는 국가 비전이다. 둘째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축으로 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다. 셋째는 진영보다 국익을 앞세우는 실용외교다.

각각은 과학기술정책과 산업정책, 외교정책으로 보이지만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축으로 연결해 보면 새로운 국가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AI 선도중견국(AI Leading Middle Power)'​이다.

AI 3대 강국은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를, 3대 메가프로젝트는 이를 실현할 산업 기반을, 실용외교는 세계와 연결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 세 축이 하나로 결합할 때 비로소 한국형 AI 국가전략이 완성된다. 필자가 'AI 선도중견국'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정책 책임자와 오피니언 리더들사이에 가장 빈번히 오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인공지능 시대에 한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짧지만 무거운 내용이다. 한국의 현실적 조건과 미래 가능성을 함께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국가 비전이 절실해졌다는 방증이다.

이 지점에서 ‘AI 선도중견국’의 개념을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중견국은 단순히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있는 국내총생산이나 인구, 군사력의 중간 규모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 국제정치에서 중견국은 강대국처럼 세계 질서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힘은 없지만 외교적 신뢰와 전문성, 국제적 연대를 통해 특정 의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중견국은 강대국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는 가교국가, 국제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조정국가, 다자주의를 지키는 규범국가의 역할을 맡아왔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중견국적 자산을 갖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경제와 제조업,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통신 산업, 높은 교육 수준과 연구개발 역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경험, 세계적인 문화 영향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일본·유럽·아세안·중동과 폭넓은 경제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자산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기술을 수입하던 나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을 만드는 나라로 성장한 경험 역시 다른 중견국들이 쉽게 갖지 못한 자산이다.

그러나 중견국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견국이 자신의 규모와 한계를 설명하는 말이라면 ‘선도’는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선도한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세계 1등을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분야에서 남보다 먼저 길을 열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며,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선도중견국은 작은 강대국이 아니다. 강대국의 축소판이 되려는 나라도 아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 기술과 산업, 규범과 국제협력을 결합함으로써 세계의 변화를 촉진하는 국가다.

AI 시대에는 이러한 선도중견국의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과거의 국력은 영토, 인구, 천연자원,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규모에 크게 좌우됐다. 그러나 AI 시대의 국력은 연산능력, 데이터, 반도체, 소프트웨어, 전력, 인재, 산업현장, 제도적 신뢰와 국제 네트워크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다. 모든 자원을 자국 안에 보유하지 못하더라도 특정한 기술과 산업을 연결하고 빠르게 실증하며 국제표준으로 확산시키는 능력이 있다면 세계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바로 여기서 한국의 기회가 열린다. 한국은 미국처럼 거대 AI 플랫폼과 초대형 클라우드를 지배하지 못한다. 중국처럼 방대한 인구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국가 차원의 AI 생태계를 구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국은 AI를 공장과 도시, 병원, 자동차, 로봇, 에너지, 국방, 농업에 적용할 수 있는 세계적 제조업과 산업 기반을 갖고 있다. AI 기술을 현실세계의 생산성과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능력에서 한국은 충분히 독자적인 길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AI 선도중견국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은 ‘AI 생산성 국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AI 경쟁은 주로 누가 더 큰 모델을 만들고, 더 많은 GPU를 확보하며,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는가에 집중돼 왔다. 물론 이러한 기반은 중요하다. 그러나 AI의 최종 성과는 컴퓨팅 자원의 보유량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기업이 AI를 활용해 제품 개발 기간을 줄이고, 공장의 불량률과 에너지 사용을 낮추며, 중소기업이 인력 부족을 극복하고, 병원이 더 정확하고 신속한 진료를 제공하며, 정부가 더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할 때 비로소 AI는 국가경쟁력이 된다. 한국의 AI 정책 목표도 ‘AI 기술 강국’에서 ‘AI 활용 강국’을 거쳐 ‘AI 생산성 강국’으로 진화해야 한다. 국가 AI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 역시 모델 수나 GPU 숫자뿐 아니라 노동생산성, 제조원가, 서비스 처리시간, 중소기업 AI 활용률,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의 창출로 바뀌어야 한다.

두 번째 전략은 한국을 ‘AI Factory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AI Factory는 단순히 기존 공장에 로봇 몇 대와 소프트웨어를 추가하는 스마트공장이 아니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AI 모델, 디지털트윈, 자율로봇, 통신망, 에너지 시스템이 결합해 공장 전체가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며 최적화되는 새로운 생산체계다.

한국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배터리, 기계, 바이오, 방산 등 세계적 제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이 산업들을 AI 기반으로 다시 설계할 수 있다면 한국은 범용 AI 모델 경쟁에서는 뒤처지더라도 산업 AI와 피지컬 AI에서는 세계적인 선도국이 될 수 있다. 제조현장을 가진 한국의 강점은 AI 시대에 낡은 유산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이 될 수 있다. 한국 제조업 전체를 거대한 AI 실험실이자 AI 생산성 플랫폼으로 바꾸는 국가적 전환이 필요하다.

세 번째 전략은 ‘AI 실증국가’다. 한국의 장점은 새로운 기술을 비교적 빠르게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국토가 비교적 작고, 디지털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으며, 제조업과 도시서비스가 밀집돼 있어 기술의 실증과 확산에 유리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규제가 실증을 가로막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사업이 분절되며, 실증 결과가 전국적 확산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지역별 산업 특성을 활용한 국가 규모의 AI 실증체계가 필요하다. 수도권은 AI 서비스·플랫폼·금융, 충청권은 반도체·바이오, 울산과 경남은 자동차·조선·기계·방산, 광주·전남은 에너지·AI 생산성, 전북은 농생명·식품, 강원은 의료·관광 AI의 실증지역이 될 수 있다. 지역 특화산업과 AI 실증을 결합하면 지역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향상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규제특례, 실증, 안전성 검증, 성과평가, 제도개선을 하나의 순환체계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AI테스트베드로 만드는 발상이다.


네 번째 전략은 ‘AI 연합설계국’이 되는 것이다. AI 시대에 어느 한 국가가 반도체, 클라우드, 데이터, 소프트웨어, 에너지, 인재를 모두 자급할 수는 없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수동적 위치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필요한 국가와 기업을 연결하는 능동적 네트워크 국가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는 AI 플랫폼·클라우드·안보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일본과는 로봇·소재·부품·제조 AI를 연결하며, 대만과는 반도체 공급망을 고도화해야 한다. 유럽과는 AI 규범·안전·그린 전환·산업표준에서 협력하고, 인도와는 인재와 소프트웨어, 아세안과는 제조업의 AI 전환, 중동과는 에너지·자본·데이터센터 분야의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 한국은 이들을 연결해 아시아와 세계의 AI 공급망을 조직하는 ‘네트워크 빌더’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AI 선도중견국은 국제규칙을 따르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규칙을 제안하는 ‘룰 메이커’, 국제표준을 먼저 만드는 ‘스탠더드 세터’, 새로운 기술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테스트베드 국가’, 국가와 기업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빌더’여야 한다. 한국이 모든 AI 분야의 패권국이 될 수는 없지만 제조 AI, 피지컬 AI, 반도체, 로봇, AI 안전, 디지털 공공서비스와 같은 분야에서는 충분히 세계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운영체제도 달라져야 한다. AI를 과학기술 부처만의 정책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AI는 산업, 경제, 에너지, 교육, 노동, 외교, 안보, 복지, 지역정책을 모두 관통하는 국가전략이다. 대통령실과 국가AI전략위원회, 관계 부처와 지방정부, 기업과 대학·연구기관을 하나의 실행체계로 묶어야 한다. 한국이 보유한 GPU, 데이터센터, 전력, 데이터, 인재, 특허와 산업현장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AI 국가대차대조표’도 필요하다.

동시에 AI 전환의 혜택이 대기업과 수도권, 고숙련 인재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소기업과 지역, 청년과 고령층, 전환위험 노동자가 AI 변화에서 배제된다면 기술적으로 앞선 나라가 되더라도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선도국은 될 수 없다. AI 선도중견국은 기술적 경쟁력과 사회적 신뢰를 함께 갖춘 나라여야 한다.

한국의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AI 모델을 보유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GPU를 가진 나라가 되는 것도 현실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AI를 제조업과 공공서비스, 도시와 지역, 국민의 일상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세계가 AI 기술을 산업과 사회에 적용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하는 나라, 선진국과 신흥국을 연결하며 새로운 협력모델을 제시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5년 뒤,10년 뒤의 한국은 세계 최대의 AI 국가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가 가장 많이 참고하는 AI 국가가 될 수 있다.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에 적용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국제규범을 만들고, 연합을 조직하는 능력을 함께 갖춘 나라다.

한국의 길은 작은 초강대국을 흉내 내는 데 있지 않다. 규모의 한계를 인정하되 전략의 수준을 높이고, 모든 분야를 좇기보다 선택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며, 추종자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이 가야 할 ‘AI 선도중견국’의 길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