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의 트래블 픽] 싱가포르보다 오래된 '래플스 호텔'… 138년 변함없는 환대 서비스
싱가포르=강상헌 기자입력 2026-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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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문열어… 객실 전체가 스위트룸
전담 버틀러가 거품목욕 세팅 등 서비스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이 탄생한 '롱 바'
100여 년 전 메뉴 재해석한 음식 등 눈길
복도에 명사들 사진 액자 세월 흔적 담겨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전경. [사진=강상헌 기자]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스탬퍼드 래플스 경이 조호르 해협의 어촌 마을에 닻을 내렸을 때만 해도 싱가포르가 지금과 같은 거대한 비즈니스 허브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동서양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강점을 품은 싱가포르는 세계의 상인과 외교관이 모여드는 교차로로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이들을 머물게 할 '환대' 산업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환대 산업의 중심에서 가장 찬란한 역사의 꽃을 피운 곳이 바로 1887년에 문을 연 '래플스 호텔'이다.
초기 래플스 호텔이 다져놓은 관광의 기반 위에서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과감한 선택을 했다. 천연자원이 전무했던 싱가포르는 국가 자체를 매력적인 방문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아시아 금융과 물류 중심지라는 강점을 살려 비즈니스 방문객을 타깃으로 한 마이스(MICE)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창이국제공항, 선텍 시티, 마리나 베이 샌즈 등 압도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며 명실상부한 아시아 1위 MICE 개최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야경. [사진=강상헌 기자]
화려한 빌딩 숲속에서도 래플스 호텔의 존재감은 단연 빛난다. 130여 년 전 아시아 최고급 환대 서비스의 기준을 제시한 역사적 공간이자 오늘날 싱가포르 관광 산업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과거 문호와 정재계 VIP들의 사교장이었던 이곳은 이제 최첨단 도심 속에서 고풍스러운 백색 건축물의 위용을 앞세워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창이국제공항에서 차로 20분 남짓 달리자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한복판에 자리한 래플스 호텔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 자박자박 자갈 진입로를 밟는 기분 좋은 마찰음과 함께 정문에 멈춰 서는 순간 붉은 카펫 위에서 영국 군복 스타일의 제복을 차려입은 시크교도 도어맨이 따뜻한 미소로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 대영제국 시절 시크교도 사람들이 군대나 주요 시설의 경비를 맡았던 군사적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이 도어맨의 유니폼은 1800년대부터 이어져 온 래플스의 상징이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로비. [사진=강상헌 기자]
호텔 로비로 발걸음을 옮기면 번잡한 대도시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문턱 하나를 넘었을 뿐이지만 완벽한 안락함을 갖춘 19세기의 우아한 시간 속으로 순간 이동을 한 듯한 감각이 온몸을 감싼다. 시선을 위로 향하면 거대한 샹들리에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그 아래로는 하프 연주자의 감미로운 선율과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이들의 찻잔 부딪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객실 내부. [사진=강상헌 기자]
1887년 10개의 객실을 갖춘 해변 방갈로에서 출발한 래플스 호텔은 현재 115개의 객실 전체가 스위트룸으로 구성된 최고급 안식처로 진화했다. 객실에 들어서면 시그니처 칵테일인 싱가포르 슬링과 땅콩 그리고 환영 편지가 정갈하게 놓인 웰컴 셋업이 투숙객을 맞이한다. 스위트룸 내부는 19세기 식민지 시대(콜로니얼) 양식의 우아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커피색의 짙은 티크목 바닥과 하얀 덧문이 훌륭한 시각적 대조를 이루며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오리지널 3단 구조의 넉넉한 공간감이 돋보인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웰컴 셋업. [사진=강상헌 기자]
래플스 호텔의 진수는 24시간 연중무휴 제공되는 전담 버틀러(집사) 서비스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체크인과 동시에 배정된 버틀러는 투숙객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모든 니즈를 한발 앞서 주도한다. 캐리어 짐을 풀어 정리해 주는 언패킹 서비스부터 외출 후 귀가 시간에 맞춘 거품 목욕 세팅은 기본이다. 객실 곳곳에 비치된 태블릿PC를 통해 터치 한 번으로 언제든 호출할 수 있어 현대적인 편의성까지 놓치지 않았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24시간 전담 버틀러(집사)가 거품 목욕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예상을 뛰어넘는 섬세함이다. 버틀러는 미니 바텐더를 자처하며 웰컴 칵테일인 싱가포르 슬링을 직접 내어주고, 수제 초콜릿 상자로 환영 인사를 건넨다. 늦은 밤 객실로 돌아오면 아늑한 무드 조명과 함께 턴다운 서비스가 투숙객을 맞이한다. 머리맡에 정갈하게 세팅된 수면 안대와 룸 스프레이, 슬리퍼가 완벽한 하루의 마침표를 찍어준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롱 바에서 맛볼 수 있는 '싱가포르 슬링(오른쪽)'과 땅콩. [사진=강상헌 기자]
◆바스락거리는 땅콩 껍질 소리와 '싱가포르 슬링'의 탄생지
래플스 호텔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롱 바'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닥에 수북이 쌓인 땅콩 껍질들로 인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테이블 위 땅콩을 까먹고 껍질을 바닥에 그대로 버리는 1920년대식 전통이 남아있는 곳이다. 쓰레기 투기에 엄격한 벌금을 부과하는 싱가포르에서 유일하게 바닥에 껍질을 버릴 수 있는 일탈의 공간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래플스 호텔 롱 바 바닥에 떨어져있는 땅콩 껍질. [사진=강상헌 기자]
약 7m 길이의 바 카운터가 인상적인 이곳은 1915년 하이난 출신의 바텐더 응이암 통 분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을 탄생시킨 발상지다. 당시 식민지 시대의 싱가포르에서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금기시됐다. 이를 기회로 본 바텐더가 여성 고객을 위해 진과 파인애플 주스, 체리 리큐어 등을 섞어 마치 핑크빛 과일 주스처럼 보이도록 위장해 만든 것이 엄청난 인기를 끌며 싱가포르 슬링의 역사가 시작됐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 럭셔리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특유의 끈적이는 단맛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세련되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싱가포르 슬링은 지역 프리미엄 증류주인 브라스 라이언 싱가푸라 진을 베이스로 삼고 신선한 파인애플과 라임 주스, 100% 석류 주스를 배합해 청량하면서도 깊은 과일의 풍미를 낸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티핀 룸에서 맛볼 수 있는 조식 메뉴들의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130년 헤리티지와 현대 미식의 조화…역사를 맛보는 래플스의 다이닝
호텔에 머무는 동안 경험하는 다이닝은 래플스의 헤리티지를 미각으로 탐구하는 여정이다. 아침이 되면 고풍스러운 '티핀 룸'에서 조식을 맛볼 수 있다. 한국인 투숙객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아침 메뉴는 단연 '카야 토스트'다. 버터를 곁들인 바삭한 카야 토스트를 간장을 살짝 뿌린 부드러운 반숙 계란에 찍어 먹고, 연유가 깔린 진한 커피를 곁들이면 한국인이 사랑하는 완벽한 '단짠(달고 짠 맛)'의 조화를 경험할 수 있다. 치즈, 양파, 고수, 붉은 고추, 토마토가 듬뿍 들어간 시그니처 오믈렛과 메이플 시럽을 흠뻑 머금은 수플레 스타일의 팬케이크 역시 후회 없는 선택이다.
전통 구리 도시락(왼쪽)에 담겨 나오는 '메라 다바'. [사진=강상헌 기자]
이어지는 점심과 저녁은 클래식과 모던을 넘나든다. 1892년부터 함께해 온 티핀 룸은 전통 구리 도시락 '메라 다바'와 셰프가 향신료를 직접 갈아주는 퍼포먼스로 북인도 마하라자(왕족)의 식문화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세계적인 스타 셰프 앙드레 치앙(오른쪽)이 메뉴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지난 3월 문을 연 '1887 by Andre'는 스타 셰프 앙드레 치앙과 협업해 래플스의 역사를 미식으로 엮어낸다. 100여 년 전 옛 메뉴판에 존재하던 '거북이 수프'를 닭고기와 생선으로 정교하게 재현해 낸 메뉴가 대표적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약탈을 피하려 땅속에 묻어 지켜냈던 유서 깊은 '실버 비프 왜건'에서 직접 소고기를 카빙해 주는 퍼포먼스는 다이닝에 생생한 역사적 현장감을 더한다.
현대 하이엔드 미식을 선도하는 '부처스 블록'에서 조던 케아오 셰프는 하와이 원주민 철학을 바탕으로 고기 전 부위를 활용하는 제로 웨이스트 장작불 요리를 선보인다. 파인다이닝 중식당 '이 바이 제레미 영'은 1000장의 종이 카드 설치 미술품으로 훌륭한 포토 스폿을 제공하고, 극적인 진입로를 거쳐 맛보는 금가루 로스트 덕으로 시각과 미각을 압도한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라이터스 바' 내부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미식의 여정은 '라이터스 바'에서 낭만적인 마침표를 찍는다. 서머싯 몸 등 대문호들을 기리는 헌정 공간인 이곳에선 과거 바텐더 응이암 통 분이 만든 또 다른 걸작 '밀리언 달러'를 맛볼 수 있다. 소설 '편지'에 등장하며 명성을 얻은 칵테일 한 잔은 과거 대문호들이 누렸던 영감의 시간을 혀끝에 고스란히 전해준다.
1902년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에는 인근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야생 호랑이가 당시 고가 건물이었던 '바 앤 빌리아드 룸' 아래에 숨어들었다가 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사진=강상헌 기자]
◆야생 호랑이부터 마이클 잭슨까지…호텔 곳곳에 새겨진 일화들
138년이라는 세월을 증명하듯 호텔 곳곳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가득하다. 1902년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야생 호랑이가 '바 앤 빌리아드 룸' 아래에 숨어들었다가 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술에 취한 인근 학교 교장 선생님이 네 번째 총알로 호랑이를 사살했다는 이 극적인 일화는 오늘날 기프트숍의 호랑이 기념품으로 남아 호기심을 자극한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복도에 마련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사진=강상헌 기자]
1993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방문은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적인 순간이다. 3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머물렀던 그는 동물원 방문이 취소되자 동물원 측이 직접 데려온 오랑우탄 '아멩'과 객실 안에서 아침 식사를 즐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호텔 복도에 마련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헤리티지를 자랑한다. 마이클 잭슨을 비롯해 찰리 채플린, 엘리자베스 테일러, 넬슨 만델라, 조지 부시, 엘리자베스 여왕, 재키 찬 등 시대를 풍미한 명사들과 정계 지도자들의 사진 액자 1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한국 배우 이진욱과 박성훈의 사진도 만나볼 수 있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는 시대를 풍미한 문화·예술계 명사들과 정계 지도자들의 사진 액자 1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사진=강상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