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저비용항공사(LCC)의 성장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디플레이션(경제 둔화 속 물가 하락)과 낮은 인건비, 저렴한 운영비를 전제로 한 저가 모델이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연료비와 인건비, 정비비가 오르는 가운데 전일본공수(ANA)와 일본항공(JAL) 등 대형 항공사도 빈 좌석을 채우려 운임을 낮추면서 LCC만의 가격 경쟁력도 예전 같지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계열 경제매체 닛케이비즈니스는 일본 주요 대형 항공사와 LCC의 운임 격차가 2012년도 2.68배에서 2024년도에는 2배 미만으로 줄었다고 5일 보도했다. 일본에서 LCC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2012년만 해도 ANA·JAL보다 훨씬 싸다는 인식이 강했다.
닛케이비즈니스가 국토교통성 자료를 토대로 ANA·JAL 등 대형 항공사와 피치항공·젯스타재팬 등 LCC의 여객수입을 분석한 결과, 운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수송인킬로미터당 여객수입'은 ANA와 JAL이 2012년도 17.8엔에서 2024년도 17.0엔으로 낮아졌다. 반면 피치와 젯스타재팬은 같은 기간 6.6엔에서 8.7엔으로 올랐다. 2012년에는 LCC 운임이 ANA·JAL의 40% 안팎에 불과했지만, 2024년에는 절반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높아졌다는 의미다.
일본 LCC의 대표주자인 피치항공의 변화도 이런 흐름 속에서 읽힌다. 피치는 2012년 3월 일본 첫 본격 LCC로 취항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해를 'LCC 원년'으로 불렀다. 피치는 간사이국제공항을 거점으로 낮은 운임과 눈에 띄는 브랜드 전략을 앞세워 젊은층 수요를 끌어들였고, 2014년 3월기에는 일본 LCC로는 처음으로 영업흑자를 냈다. 올해 3월 1일 기준 국내선 25개, 국제선 15개 노선을 운항하며 연간 탑승객은 900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LCC 특유의 저가 이미지에만 기대기 어려워지면서 피치도 고객층을 넓히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피치는 지난 3월 말 브랜드 쇄신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선명한 분홍색 로고를 차분한 베이지색으로 바꾸기로 했다. 피치 측은 중장년 고객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젊은 여성층을 겨냥한 눈에 띄는 색상과 저렴한 운임으로 성장해 온 피치가 보다 넓은 연령층으로 고객 기반을 넓히려는 것이다.
한편 피치는 2024년 12월 ANA홀딩스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됐다. 이 같은 위상 변화는 노선 운영과 그룹 내 역할 분담에도 반영되고 있다. 출범 초기에는 일본에 낯설었던 LCC 모델을 정착시키기 위해 ANA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운임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ANA그룹 안에서 대형 항공사와 LCC가 노선과 고객층을 나눠 맡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실제로 ANA는 지난 3월 말 새 운항 일정에서 간사이공항을 출발하는 나하·미야코·이시가키·신치토세 4개 노선의 운항을 중단했다. 반면 피치는 신치토세와 나하 노선을 증편했다. 대형 항공사가 운항하기에는 수익성이 낮은 노선을 그룹 내 LCC에 맡긴 모양새다.
이 같은 역할 분담의 배경에는 대형 항공사의 국내선 수익성 악화가 있다. ANA와 JAL은 지난해 5월 국토교통성 전문가 회의에서 국내선 사업에 대해 정부 지원이 없다면 사실상 적자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연료비와 인건비, 정비비가 오른 데다 인구 감소로 국내선 수요 확대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ANA 측은 주요 노선의 이익으로 지방 노선을 유지해 온 내부 보전 구조도 한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LCC 모델의 변화는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인플레이션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저렴한 인건비와 낮은 운영비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기업일수록 비용 상승을 흡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일본 국내선 시장은 인구 감소로 수요 확대가 쉽지 않은 데다,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항공사의 비용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결국 LCC는 낮은 운임만으로 성장을 이어가기 어려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대형 항공사와 보조를 맞춰 운임을 올리면서 서비스 부가가치로 승부할지, 낮은 운임을 유지하면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짤지가 향후 경쟁력을 좌우할 전망이다. 인플레이션이 길어질수록 '싸게 팔아 성장한다'는 일본 저가 비즈니스 모델 전반의 전략 수정도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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